항목 ID | GC08400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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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錫英 |
영어공식명칭 | Jang Seokyeong |
이칭/별칭 | 장석교(張碩敎),회당(晦堂),추관(秋觀)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정철 |
출생 시기/일시 | 1851년 - 장석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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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878년 - 장석영 이진상의 문인이 됨 |
활동 시기/일시 | 1880년 - 장석영 북청부사로 부임하는 아버지 수행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장석영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이승희·곽종석과 함께 올림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장석영 칠곡 지역 국채보상회 회장으로 추대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장석영 파리 장서 작성에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장석영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고 2년간 옥고를 치름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장석영 제2차 유림단 의거 때 영남 대표로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26년 7월 17일 - 장석영 사망 |
출생지 | 장석영 출생지 -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 |
거주|이주지 | 장석영 이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창천리 |
학교|수학지 | 회연서원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
활동지 | 녹동서당 -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 |
묘소 | 장석영 묘소 -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행정리 산22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제2차 유림단 의거 영남 대표 |
[정의]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성주 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이진상(李震相)[1818~1886]의 문인으로 조선 시대 학문을 제대로 이어받은 마지막 시대의 인물이자 유림의 사고와 세력을 토대로 을사늑약(乙巳勒約) 반대와 국채 보상 운동 및 3.1 만세 운동에도 참여한 인물이다.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 일명 석교(碩敎). 호는 회당(晦堂) 혹은 추관(秋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9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금헌(噤軒) 장주(張鑄)이고, 할아버지는 장보(張[氵+寶])이다. 아버지는 형조참판을 지낸 운고(雲皐) 장시표(張時杓)[1819~1894]이며, 어머니는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후손 정완(鄭垸)의 딸이다. 형이 과재(果齋) 장석신(張錫藎)이다.
[활동 사항]
장석영(張錫英)[1851~1926]은 1851년(철종 2) 현재의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에서 출생하였다. 28세였던 1878년(고종 15) 봄에 한강 정구를 배향한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 향음주례(鄕飮酒禮)에 참석하여 처음 만난 한주(寒洲) 이진상의 학문과 인품에 감복하여 문인이 되었다. 이진상의 문하에서 9년간 학문을 닦았고,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 남려(南黎) 허유(許愈)와 동문으로 교유하였다. 30세 때인 1880년(고종 17)에 북청부사로 부임하던 아버지를 수행하여, 책방(冊房)의 임무를 맡아 지역의 문풍을 진작시키고 『북정록(北征錄)』을 지어 산천과 풍속을 기록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영남 유생 삼백여 명을 규합하여 일제 침략을 규탄하고, 이승희·곽종석과 함께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렸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될 때, 칠곡 지역 국채보상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1912년 3월~6월 만주 독립운동 기지와 이주지를 물색하기 위해 서간도와 북간도를 여행하며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때 교민의 생활상을 조사 기록한 것이 『요좌기행문(遼左紀行文)』이다.
이후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곽종석·김창숙(金昌淑) 등과 협의하여 파리 평화 회의에 제출할 독립 청원서 초안을 작성하였다. 또한 고향에서도 만세 운동을 펴기 위해 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 등의 유림들과 접촉하여 만세 운동 일정을 계획하였다. 이어 같은 해 4월 2일 성주 장날에 열린 독립 만세 운동에 적극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때의 옥중 일기가 『흑산록(黑山錄)』이다. 1925년 제2차 유림단 의거 때는 영남 대표로 활동하였다. 만년에는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 녹동서당(甪洞書堂)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조선 시대 마지막 성리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스승인 한주 이진상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계승하고 수호하는 데 힘을 쏟았다. 동시에 유림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서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1926년 7월 17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회당집(晦堂集)』, 『북정록(北征錄)』, 『요좌기행문(遼左紀行文)』, 『흑산록(黑山錄)』 등이 전한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행정리 산22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80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