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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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忠民 |
영어공식명칭 | I Chungmin |
이칭/별칭 | 여직(汝直),모암(慕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영옥 |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문인.
[가계]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여직(汝直), 호는 모암(慕巖). 시조는 벽진장군(碧珍將軍) 이총언(李悤言)이다. 12대 뒤 진현관 제학(進賢館提學)을 지내고 시호가 문안(文安)으로 산화 선생(山花先生)이라 일컬어진 이견간(李堅幹)이 당세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견간의 8세손이 이충민의 고조할아버지로 이름은 이회남(李懷南)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수질(李守質)이고, 할아버지는 이창국(李昌國)으로 효행이 뛰어났다. 아버지는 이탁이(李卓爾)로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약목 유씨(若木柳氏)로 유인부(柳仁敷)의 딸이다. 부인은 유덕시(柳德時)의 딸과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
[활동 사항]
이충민(李忠民)[1588~1673]은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매우 슬프게 울었다. 7세에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선산군 인동(仁洞)[현 구미시 인동동]으로 가서 살았으며, 홀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15세에는 무흘서재(武屹書齋)에 가서 한강(寒江) 정구(鄭逑)1543~1620]을 찾아 수학하였다. 일찍이 “빌고 또 비노니, 황천에 비옵니다. 부귀와 공명은 내 바라는 바가 아니고, 다만 어머니께서 학같이 머리가 희어질 때까지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효심을 노래하였다. 완석정(浣石亭) 이언영(李彦英)과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를 아버지처럼 섬기고 학문을 배웠다. 형제 간의 우애가 두터워 형이 세상을 뜨자 조카를 자식처럼 보살폈다.
1610년 스승 정구가 정인홍(鄭仁弘)[1535~1623]과 갈등이 있을 때 박이립(朴而立)이 정구를 무고하자, 글을 지어 적극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하고 성주 문인들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 「상한강선생(上寒岡先生)」에 그 내용이 있고, 또한 돈봉(遯峯) 김녕(金寧), 도곡(陶谷) 박종우(朴宗祐) 등과 함께 했던 일에 관련해서는 「서소청일기후(書疏廳日記後)」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인조 등극 초에 구언(求言)[임금이 신하의 바른말을 널리 구함]의 유지에 응하여 「응지언사소(應旨言事疏)」를 올려 ‘인재를 등용하는 일’, ‘군대를 다스리는 일’, ‘백성들을 풍족하게 하는 일’ 이 세 가지에 대해 견해를 피력하였다. 또한 고을의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경술(經術)과 행실을 중시하고, 과거 공부에만 빠져 있는 것을 경계하였다. 1671년 나라에서 원로를 대우하는 예로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에 올랐다.
이충민은 성주 지역의 경술이 인근 지역, 특히 대구 등지로 확장하는 데 일조하였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모암문집(慕巖文集)』[『모암집(慕巖集)』]이 있다.
[묘소]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장림리 두곡 고개에 부인과 합장되어 있다. 두곡 고개는 본래 두곡산이었으나 현재는 두곡 고개로만 그 명칭이 남아 있다. 묘비는 정재(靜齋) 이담명(李聃命)이 행장을 짓고, 귀와(龜窩) 김굉(金㙆)이 묘갈명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