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6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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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時發 |
영어공식명칭 | I Sibal |
이칭/별칭 | 양구(養久),벽오(碧梧),후영어은(後潁漁隱),충익(忠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진갑곤 |
[정의]
조선 후기 성주목사로 재직한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양구(養久), 호는 벽오(碧梧)·후영어은(後潁漁隱). 고조할아버지는 이원(李黿), 증조할아버지는 이발(李渤), 할아버지는 이경윤(李憬胤)이다. 아버지는 진사 이대건(李大建)이며, 어머니는 김도(金燾)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시발(李時發)[1569~1626]은 1569년(선조 2)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읍 장대리에서 태어났다.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의 문인이었고, 1589년(선조 22)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문신이면서도 국방·군사 방면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박춘무(朴春茂)에 종군하여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웠다. 1594년(선조 27) 병조좌랑 재직 중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진운홍(陳雲鴻)을 따라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영을 방문하여 정탐 임무를 수행했고, 이듬해 병조정랑으로 승진하여 순무어사(巡撫御史)를 겸임하였다.
1596년(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승진했다가 사직하고, 청주 후영리(後穎里)로 하향하여 산수를 즐기며 스스로를 후영어은(後潁漁隱)이라 불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분조(分朝)의 호조참의가 되어 명나라 원병의 군량미 보급을 관장하였다. 1599년(선조 32) 성주목사로 부임한지 20일 만에 경주부윤으로 옮겨갔고, 1602년(선조 35)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어 4년간 선정을 베풀었다. 1604년(선조 37) 형조참판을 지내고, 이듬해에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포루(砲樓)와 성곽을 수축했으며, 그해 가을에 예조와 병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이후 1618년(광해 10) 폐모론을 반대하여 양사의 탄핵을 받아 사직했다가, 1619년(광해군 11) 광해군(光海君)의 특명으로 오도찬획사(五道贊劃使)로 임명되었다. 다음 해 평안도에 가서 민폐를 크게 고치고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을 충족하게 하였다. 이때 고향 친척인 옥강만호(玉江萬戶) 변일(邊溢)이 청병(淸兵)의 침입 때 성을 버리고 도망한 죄로 사형을 당했고,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이시발에게도 책임을 묻자 신병을 칭탁(稱託)하고 사직하였다.
1623년(인조 1) 반정이 일어나자 한성부판윤에 등용되었다가 바로 이어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체찰부사(體察副使)로 난의 수습에 공을 세웠다. 그 뒤 삼남도검찰사(三南道檢察使)가 되어 남한산성의 역사(役事)를 감독하였다. 1626년(인조 4)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주변록(籌邊錄)』 1책, 『벽오유고(碧梧遺稿)』 8권 4책이 전한다.
[묘소]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지전 마을 묘좌 언덕에 있다.
[상훈과 추모]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