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6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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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健 |
영어공식명칭 | O Geon |
이칭/별칭 | 자강(子强),덕계(德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정철 |
[정의]
조선 전기 성주 훈도에 임명되어 교육에 힘쓴 문신.
[가계]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강(子强), 호는 덕계(德溪). 아버지는 오세기(吳世紀)이고, 어머니는 증산 훈도(甑山訓導)를 지낸 도영강(都永康)의 딸 팔거 도씨(八莒都氏)이다. 28세에 진사 이광(李光)의 딸 성주 이씨(星州李氏)와 결혼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아버지와 종동서 간이 되었다.
[활동 사항]
오건(吳健)[1521~1574]은 산음현 덕천리[현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지리 덕촌]에서 태어났다. 1552년(명종 7) 32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58년(명종 13) 38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559년(명종 14) 첫 벼슬로 권지 성균관 학유(權知成均館學諭)가 되었다. 곧 성주 훈도(星州訓導)로 나갔다. 당시 성주목사가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1517~1563]이었는데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가장 아끼던 제자였다. 오건과 황준량은 뜻이 같고 기질이 서로 맞아 주자서(朱子書)를 함께 토론하였다. 황준량 역시 성주 교관을 거쳐서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오건과 황준량은 의기투합하여 침식을 잊고 학문을 연구하고 교육에 힘을 썼다. 성주의 유생들을 뽑아서 네 등급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이때 후일 대학자가 되는 한강 정구는 소년이었는데, 오건에게 배웠다.
이때 오건의 학문이 황준량을 통해 이황에게 알려졌다. 황준량과 함께 녹봉정사(鹿峰精舍)[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를 짓고 학생을 모아 가르쳤다. 수년 후 오건은 직접 이황을 찾아가서 학문적 인연을 맺었다. 1562년(명종 17) 병으로 성주 훈도를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뒤에도 황준량과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심경(心經)』과 『계몽(啓蒙)』에서 의문 나는 곳을 서로 물었다. 정언, 공조좌랑, 이조좌랑,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저술]
오건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과 퇴계 이황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건이 조식을 처음 만난 것은 31세 때였고, 이황을 처음 만난 것은 43세 때였다. 때문에 오건의 학문은 스스로 깨우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다만 조식과 이황을 통해서 오건의 학문이 더욱 발전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오건의 학문은 이론 전개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쪽이었다. 그런 면에서 오건은 이황보다는 조식의 학문 성향에 가까웠다. 오건의 문집에는 이기심성(理氣心性)을 논하는 글은 거의 없다.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한 수양론적인 학문이었다. 오건은 이상적인 이론에 치우친 학자가 아니고, 현실을 아는 실천주의자였다. 『덕계문집』, 『정묘일기(丁卯日記)』 등의 저술이 있다.
[묘소]
묘는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지리 산청 서계서원(山淸西溪書院) 옆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지리에 있는 산청 서계서원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