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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636
한자 呂希臨
영어공식명칭 Yeo Huirim
이칭/별칭 천지(天之),원정(圓亭)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정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81년연표보기 - 여희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07년 - 여희림 사마시에 합격
활동 시기/일시 1516년 - 여희림 고향에서 여씨향약 실시
활동 시기/일시 1516년 - 여희림 월회당 설립
활동 시기/일시 1517년 - 여희림 복성군의 사부가 됨
활동 시기/일시 1533년 - 여희림 기장과 함평으로 유배
활동 시기/일시 1538년 - 여희림 재등용되어 지평 역임
몰년 시기/일시 1553년연표보기 - 여희림 사망
출생지 여희림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백전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여희림 이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여희림 유배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거주|이주지 여희림 유배지 - 전라남도 함평군
수학|강학지 월회당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성주로 2495[수촌리 890-3]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운양서원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운정리 517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구강재 -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성주로 1037[봉두리 산52-1]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성산
대표 관직|경력 지평

[정의]

조선 전기 성주 출신의 문신.

[개설]

연산군(燕山君)과 중종(中宗) 때 사화(士禍)의 시기를 살았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1478~1543],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1486~1562],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1482~1519], 충암(冲菴) 김정(金淨)[1486~1521] 등 당시의 중요한 인물들과 친교가 있었다. 사화로 유배를 가기도 하였지만 조심스러운 처신으로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향촌에서 유교 이념의 보급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경상북도 성주군]. 자는 천지(天之), 호는 원정(圓亭). 아버지는 원종공신(原從功臣) 선공감역(繕工監役) 여우창(呂遇昌)이고,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목사 홍현정(洪顯廷)의 딸이다. 형은 진사 여희단(呂希端)이다. 후손들 중에 뛰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활동 사항]

여희림(呂希臨)[1481~1553]은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백전리에서 태어났다. 1498년(연산군 4) 18세에 용봉산(龍鳳山)에 있는 절에서 도형(都衡)·이광(李光) 등과 함께 학문을 닦았는데, 그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사림이 화를 당하자 과거를 단념하였다. 당시 여희림은 김안국·소세양·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1491~1570] 등과 교우 관계를 가졌다. 1507년(중종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조광조·김정 등과 교우를 맺었다. 1516년(중종 11)에 고향에 내려가 주자(朱子)가 증보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하였다. 그 이듬해 수천(守天) 정광필(鄭光弼)[1462~1538]의 추천에 의해 복성군(福城君)[중종의 서장자]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519년 현량과(賢良科)가 설치되자 여희림은 형 여희단(呂希端)과 함께 천거되었으나 응시를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기묘사화(己卯士禍)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수촌리에 남전향약(藍田鄕約)을 시행하기 위해 모임 장소로 1516년 월회당(月會堂)을 세웠다. 이후 1664년(현종 5)에 여희림의 고손자인 여효증(呂孝曾)[1604~1679]이 현재의 자리인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890-3번지[성주로 2495]로 옮겼다. 월회당은 1919년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보낼 ‘파리 장서(長書)’를 써서 김창숙(金昌淑)[1879~1962], 여상윤(呂相胤)[1855~1942]이 서명하여 독립 만세를 부른 본거지이기도 하다. 월회당은 1984년 5월 21일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533년(중종 28) 김안로(金安老)[1481~1537]가 경빈 박씨(敬嬪朴氏)를 폐하고 복성군을 귀양 보낼 때 복성군의 사부를 지냈다는 이유로 기장(機張)에 유배되었다가 함평(咸平)에 이배된 후 풀려났다. 1538년(중종 33) 다시 등용되어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학문과 저술]

1510년(중종 5)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을 찾아가 변역(變易)·소장(消長)의 이치에 관해 문답하고 서로 의견 일치를 본 바 있다. 여희림이 지은 것은 아니지만, 여희림의 사적 등을 수록한 『원정선생실기(圓亭先生實紀)』가 있다. 1933년에 성주에 있는 경행서당(景行書堂)에서 간행되었다.

[상훈과 추모]

여희림의 위패는 본래 벽진면 해평동[현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천곡서원(川谷書院) 향현사(鄕賢祠)에 모셔졌었으나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령 때 소실되었다. 1874년 사림이 힘을 모아 운정동(雲亭洞)[현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운정리 517번지]에 운양서원(雲陽書院)을 세우고 명덕사(明德祠)에 위패를 다시 모셨다. 이원조(李源祚)가 행장을, 이현일(李玄逸)이 묘갈(墓碣)을 썼다. 후손들이 여희림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며 1558년(명종 13)에 구강재(龜岡齋)를 세웠으며 원래 있던 자리가 수몰되어 현재의 자리인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봉두리 산52-1번지[성주로 1037]로 옮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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