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632 |
---|---|
한자 | 呂應奎 |
영어공식명칭 | Yeo Eunggyu |
이칭/별칭 | 경첨(景瞻),국반(菊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정철 |
출생 시기/일시 | 1800년 - 여응규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874년 - 여응규 통정대부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876년 - 여응규 사망 |
출생지 | 여응규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
묘소|단소 | 여응규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용암리 달창 |
사당|배향지 | 국반재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959 |
성격 | 문인|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성산 |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경상북도 성주군]. 자는 경첨(景瞻), 호는 국반(菊伴). 여효주(呂孝周)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여의망(呂宜望)이고, 아버지는 여백행(呂百行)이다. 외할아버지는 옥산(玉山) 장동우(張東羽)이다. 아들은 여무보(呂茂甫)이다.
[활동 사항]
여응규(呂應奎)[1800~1876]는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서 태어났다. 1809년(순조 9)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죽어서도 네가 유학자가 되는 것을 지켜보겠다.”는 어머니의 유지를 가슴에 새기고 공부에 전심하였다.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노(老)·불(佛) 등으로 나라가 점점 오염되자, 「척사설(斥邪說)」을 썼는데 노·불을 배척하고 유학의 진흥책으로 향약의 결성과 후생에 대한 강학(講學)을 강조하여 사풍(士風)을 격려하였다. 1874년(고종 11)에 수(壽)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9세기 어지러운 시기에 지역에서 활동하던 재지 지식인으로 유학의 진흥에 노력하였다.
[학문과 저술]
종숙(宗叔)인 모헌(慕軒) 여익행(吕翼行)과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1777~1861]의 문인(門人)이다. 여응규의 문집에 실린 「척사설」은 여응규의 사상을 잘 보여 준다. 여기서 여응규는 노·불을 양주(楊朱)·묵적(墨翟)과 같은 부류로 생각해 배척하고 있으며, 유학의 진흥책으로 향약의 결성과 후생에 대한 강학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육덕(六德)[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여섯 가지 도의(道義). 지(知), 인(仁), 성(聖), 의(義), 충(忠), 화(和)를 이름]·육행(六行)[여섯 가지 덕행. 효도, 형제 우애, 친족 화목, 외척 친목, 친구 간의 믿음, 구휼을 이름]·육예(六藝)[고대 중국 교육의 여섯 가지 과목.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이름]의 삼물(三物)과 불효(不孝)·불목(不睦)·불인(不婣)·부제(不弟)·불임(不任)·불휼(不恤)·조언(造言)·난민(亂民) 등에 대해 팔형(八刑)으로 교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월회당양노소절목서(月會堂養老所節目序)」와 「회로당중수기(會老堂重修記)」 등은 당시에도 노인을 위한 시설이 있었음을 알려 준다. 시문집 『국반집(菊伴)』은 아들 여무보가 20세기 초에 목활자본 6권 2책으로 편집, 간행하였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용암리 달창(達倉) 부곤원(負坤原)에 있다.
[상훈과 추모]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가 행록(行錄)을 썼다. 후손들이 여응규의 학덕을 추모하여 1900년경에 국반재(菊伴齋)를 설립하였다.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959번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