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631 |
---|---|
한자 | 呂良裕 |
영어공식명칭 | Yeo Yangy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진갑곤 |
활동 시기/일시 | 1380년 - 여양유 운봉 대첩 때 군량 공급 |
---|---|
출생지 | 여양유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백전리 |
거주|이주지 | 여양유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백전리 |
사당|배향지 | 경재당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백전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성산 |
[정의]
고려 후기 성주 출신의 문신이자 성산 여씨 중시조.
[개설]
여양유(呂良裕)[?~?]는 신라 때 전서(典書)를 지낸 여어매(呂禦梅)의 후손이다. 부인은 동정(同正) 이창간(李昌幹)의 딸이자 농서군(隴西君) 이장경(李長庚)의 외손녀인 벽진 이씨(碧珍李氏)이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중랑장(中郞將) 여위충(呂渭忠)과 판도판서(版圖判書) 여위현(呂渭賢)이다.
[활동 사항]
여양유는 충렬왕(忠烈王) 때 성주 본아리(本牙里)[현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백전리] 야동(冶洞)[일명 불무골]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줄곧 살았다. 학행(學行)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진사(進士)가 되었고, 1380년(우왕 6) 이성계(李成桂)가 전라도 운봉(雲峰)에서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무찌를 때 자진하여 군량 공급을 맡았다. 여양유와 이성계와의 만남을 『경산지(京山志)』에서는 “고려 후기 이 태조가 왜장 아지발도를 정벌하러 갈 때 그의 집에서 밥을 먹고 낮잠을 한숨 자고 갔다고 한다. 그 집은 임진왜란 때 불탔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아마 이 일을 계기로 이후의 일이 이루어진 것 같다. 운봉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이후 논공행상에서 여양유에게는 삼중대광(三重大匡)의 훈호(勳號)가 내려졌고, 이후 세보(世譜)가 이룩되면서 여양유는 성산 여씨(星山呂氏)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묘소]
여양유와 정경 부인 벽진 이씨의 묘소는 모두 실전되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백전리에 여양유의 재사(齋舍)인 경재당(敬梓堂)과 여양유 유허비가 있다. 경재당에서는 해마다 한식날 제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