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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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良文 |
영어공식명칭 | Yang Moon |
이칭/별칭 | 경산부 장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진갑곤 |
[정의]
남북국 시대 성주 지역을 지키다 고려 태조에 투항한 장수.
[개설]
양문(良文)은 남북국 시대에 신라의 벽진군(碧珍郡)[현 경상북도 성주 지역의 신라 말 고려 초 이름]을 지키다 923년 고려에 귀부(歸附)한 장수이다.
[활동 사항]
양문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된 것이 전부이다. 『삼국사기』에는 923년(경명왕 7) 7월조에, “명지성(命旨城)[현 경기도 포천] 장군 성달(城達)과 경산부(京山府)[현 경상북도 성주 지역의 고려 시대 이름] 장군 양문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라는 기록이 실려 있다. 그리고 『고려사』에는 같은 해에 해당하는 태조 6년 8월 1일조에, “벽진군(碧珍郡) 장군 양문이 생질 규환(圭奐)을 보내 투항해 오자 규환을 원윤(元尹)으로 임명하였다”라는 기록이 실려 있다. 다만 『삼국사기』에는 7월 경산부라 하였고, 『고려사』에는 8월 벽진군이라 하여 달과 지역명에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와 『고려사』「지리지」에는, 성주가 본래 신라의 본피현(本彼縣)으로 경덕왕 때 신안현(新安縣)으로 고쳤으며, 후에 벽진군으로 개명하였다가 940년(태조 23)에 경산부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928년(태조 11) 1월에 왕건(王建)이 견훤(甄萱)에게 보낸 답서에서 “경산함벽이투항(京山含璧以投降)[경산에서 장수가 자진해서 손을 뒤로 묶은 채 벽옥(璧玉)을 입에 머금고 투항하였다]”라고 한 『고려사』의 기록으로 봐서 이미 940년 이전에 경산부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아마 923년에 양문이 고려에 투항함으로써 신안현이 경산부로 승격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에 부(府)로의 승격은 고려 왕조에 대한 귀부나 협조가 주요한 요인이 되었는데, 재암성(載巖城) 장군 선필(善弼)이 내투(來投)하여 보성부(甫城府)가 된 것도 한 예가 된다. 또한 7월과 8월로 한 달이 차이가 나는 것은 양문이 7월에 생질을 보내 항복할 뜻을 전하고 8월에 항복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양문과 벽진군 호족 이총언(李悤言)을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총언은 왕건이 사람을 보내 화란(禍亂) 평정을 호소하자 아들 이영(李永)을 보내 왕건을 도운 인물이기에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