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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594
한자 裵楗
영어공식명칭 Bae Geon
이칭/별칭 수부(守夫),고암(高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우인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5년연표보기 - 배건 출생
몰년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배건 사망
출생지 배건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지도보기
묘소 배건 묘소 -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구례리
성격 의병
성별

[정의]

조선 전기 성주 출신의 의병.

[개설]

임진왜란 때 김산(金山)[현 경상북도 김천시] 여남현(汝南峴)으로 형 배설(裵楔)[1551~1599]을 만나러 가다가 왜적을 만나 싸웠지만, 전사하였다.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수부(守夫), 호는 고암(高巖). 아버지는 성주 의병장 배덕문(裵德文)[1525~1602]이고, 배설의 동생이다.

[활동 사항]

배건(裵楗)[1555~1592]은 1555년(명종 10)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에서 태어났다. 김희삼(金希參)의 제자로 효성이 지극했고, 음사(蔭仕)로 선무랑(宣務郞)을 지냈다. 임진왜란 초기 왜군이 빠르게 북상하자 성주를 비롯한 인근 고을의 수령들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피신하기에 급급하였다. 성주판관(星州判官) 고현(高晛)도 젊은 무부(武夫)였지만 홀로 먼저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왜군은 5월 18일에 성주를 점거한 후 낙동강 수로를 장악하여 후방의 보급을 원활하게 하는 한편 북상한 자국군의 후방 안전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성주를 점거한 왜군은 수십 명에서 수백 명 정도였고, 거점을 지키면서 주변을 약탈하고 있었다. 이에 처음에는 피신하기 급급했던 사람들이 점차 의병을 결성하여 일본군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대개 경상도의 의병 부대는 자신들의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성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성주 인근의 낙동강이 왜군의 중요한 보급로였을 뿐만 아니라 약탈품을 수송하는 길이기도 했기 때문에 성주 의병들의 활동도 낙동강 연변 지역에 집중하고 있었다.

성주 의병은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던 68세의 배덕문을 의병장으로 추대했고, 배덕문은 바로 배건의 아버지였다. 배건은 아버지를 모시면서 명에 따라 여러 가지 업무를 수행하던 중, 성주 인근의 김산 근처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성주성배건의 죽음이 밑거름이 되어 결국 수복되었다.

임진왜란 초기 왜군에 점령된 성주성을 수복한 것은 성주 및 인근 지역의 의병과 관군이 연합해서 끈질긴 투쟁으로 얻어낸 소중한 결과였다. 모두 세 차례에 걸친 탈환전을 펼치며 왜군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철수하게 만들어 수복한 것이었다. 선조(宣祖)는 “내가 경상도의 충의를 믿었거니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구나!”라고 칙유(勅諭)하였다. 성주성을 수복함으로써 성주 일대가 왜군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왜군을 선산 방면으로 쫓아내게 되면서 전라도 침범 계획까지 좌절시킬 수 있게 되었다.

[묘소]

묘소는 금릉군 여남[현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구례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에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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