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5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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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而章 |
영어공식명칭 | Bak Ijang |
이칭/별칭 | 숙빈(叔彬),용담(龍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세욱 |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박이장(朴而章)[1547~1622]의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숙필(叔彬), 호는 용담(龍潭)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지낸 박한하(朴漢何)이고, 할아버지는 경릉참봉(敬陖參奉)을 지낸 박식(朴埴)이다. 아버지는 승지 박양좌(朴良佐)[1521~1599]이며, 어머니는 별좌(別坐) 배은(裵垠)의 딸 성산 배씨(星山裵氏)이다. 2남 1녀의 둘째로 태어난 박이장은 참판 박응복(朴應福)의 딸 충주 박씨(忠州朴氏)와 혼인하여 2남 4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박이장은 노수신(盧守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86년(선조 19)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벼슬길에 올랐다. 대교, 교리를 거쳐 1590년 호남 선무사로 나아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이조정랑을 거쳐 1597년(선조 30) 수원부사로 나아가 『수원지(水原志)』를 완성하였다. 부모의 상을 연이어 치른 뒤 1601년 성균관 전적으로 출사하였다. 이듬해 직제학, 동부승지, 대사성, 대사강, 부제학을 연이어 역임하고 1603년(선조 36) 동지사로 북경에 다녀왔다. 이듬해 한성부좌윤, 영해부사로 나아갔고 1605년 『영해지(寧海志)』를 완성하였다. 1608년 정인홍을 논계하고 내려와 진보(眞寶)[현 경상북도 청송군]에 어호정사(漁湖精舍)를 짓고 우거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구원하다 청송감무관(靑松監務官)으로 좌천되었고, 이듬해 폐모론이 일자 만인소를 올렸다가 삭직되어 진보로 돌아왔다. 1617년 용담리(龍潭里)로 돌아왔다가 성주 연봉촌(延鳳村)에 우거하며 서재 모덕와(慕德窩)를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유리에 짓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학문과 저술]
면우(勉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이 쓴 묘지명에 따르면, 박이장의 저술로 『관혼촬요(冠昏撮要)』, 『정서절요(程書節要)』, 『육경려해(六經蠡海)』, 『심경촬요(心經撮要)』, 『상재만록(桑梓漫錄)』 등이 있었으나 서재인 모덕와가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1911년 후손들이 간행한 『용담집(龍潭集)』 7권만이 전한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유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01년(선조 34) 호성 선무 원종공신(扈聖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고, 1622년(광해군 14) 성주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