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5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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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宇宏 |
영어공식명칭 | Gim Ugoeng |
이칭/별칭 | 경부(敬夫),개암(開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정철 |
출생 시기/일시 | 1524년 - 김우굉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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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52년 - 김우굉 진사시 장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66년 - 김우굉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73년 - 김우굉 부수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78년 - 김우굉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89년 - 김우굉 퇴관 |
몰년 시기/일시 | 1590년 - 김우굉 사망 |
출생지 | 김우굉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
거주|이주지 | 김우굉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
묘소|단소 | 김우굉 묘소 -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회상리 |
사당|배향지 | 속수서원 -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속암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의성 |
대표 관직 | 홍문관 부제학 |
[정의]
조선 전기 성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경부(敬夫), 호는 개암(開巖). 아버지는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낸 칠봉(七峯) 김희삼(金希參)이며, 어머니는 곽인화(郭人和)의 딸 청주 곽씨(淸州郭氏)이다. 형은 이계(伊溪) 김우홍(金宇弘)[1522~1590]이고 동생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이다.
[활동 사항]
김우굉(金宇宏)[1524~1590]은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조식(曺植)[1501~1572]과 가까워서 조식에게 학문을 배웠다. 1542년(중종 37) 향시에 수석으로 급제하고, 1552년(명종 7) 진사시에도 수석으로 급제하였다. 1565년(명종 20)은 문정 왕후(文定王后)를 정점으로 하는 척신 정권에 대한 사림의 전국적인 저항이 최고조에 달하였던 해이다. 경상도 유생들이 이 저항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는데, 이를 선두에서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김우굉이다. 김우굉은 여덟 차례에 걸쳐 문정 왕후와 친밀했던 승려 보우(普雨)를 주살할 것을 상소하였다. 156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주서(注書)·대교(待敎)·봉교(奉敎)·전적(典籍), 예조와 병조의 좌랑·정랑, 지제교(知製敎)·정언(正言)·헌납(獻納)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573년(선조 6)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578년 동부승지와 대사간·대사성 등을 지내고 1579년(선조 12) 병조참의와 승지에 이르렀다. 1582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고, 형조참의와 홍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탄핵을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 광주목사와 청송부사 등을 지냈다.
1589년(선조 22) 관직에서 물러난 김우굉은 상주로 가서 낙동강이 휘담아 도는 야산 자락에 별장을 지었는데 그것이 개암(開巖)이다. 김우굉의 호도 여기에서 딴 것이다. 그 해에 동생 김우옹이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연좌되어 안동의 임지에서 회령(會寧)으로 귀양을 가게 되자 영천[현 경상북도 영주시]으로 달려가 동생을 만나고 갓과 옷을 벗어 주고 시 한 수를 지어 주며 이별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듬해 정월 김우굉은 병사하였다. 김우굉은 대사간으로 있을 때 사사로이 옥송(獄訟)을 결정한 형조판서를 당당히 탄핵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학문과 저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확고한 자세와 성리학적 질서를 지향하는 세계관을 조식에게서 물려받았다. 『개암집(開巖集)』이 전한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회상리 매골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상주 속수서원(凁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묘갈명을 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