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549 |
---|---|
한자 | 權應仁 |
영어공식명칭 | Gwon Eungin |
이칭/별칭 | 사원(士元),송계(松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우인수 |
출생 시기/일시 | 1517년 - 권응인 출생 |
---|---|
출생지 | 권응인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오도리 |
묘소|단소 | 권응인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안동 |
[정의]
조선 전기 성주 출신의 문인.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원(士元), 호는 송계(松溪). 아버지는 권희맹(權希孟)이고, 참판 권응정(權應挺)의 서제(庶弟)[아버지의 첩에게서 태어난 아우]이다.
[활동 사항]
권응인(權應仁)[1517~?]은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오도리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종~선조 때 활동한 학자이자 문인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제자로 시문에 능하였다. 서얼 출신이라 벼슬에 제한이 있어 한리학관(漢吏學官)에 머물렀으나 명문장가(名文章家)로 이름이 높았으며, 중국과의 외교 문서가 권응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1542년(중종 37)에 형 권응정을 따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때 무령현(撫寧縣)의 벽 위에 “말 통하려 땅에 쓰기 번거롭지만/ 명나라 문물 보고 나서 조회 왔음을 기뻐하네[通言煩畫地 觀樂喜朝明].”라는 시를 쓴 바 있었다. 그 뒤 1562년(명종 17) 즈음에 한 압마관(押馬官)이 돌아와서, 어떤 고을 관사를 모두 다시 지었는데 권응인이 시를 적어둔 옛 벽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또 그해에 일본 국왕의 사신이 나올 때 선위사(宣慰使) 일행으로 발탁되어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권응인은 송대(宋代)의 시풍이 유행하던 당시에 만당(晩唐)[시(詩)의 발달을 기준으로 나눈 중국 당나라 역사의 네 시기 중 마지막 시기]의 시풍을 받아들여 큰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다. 심수경(沈守慶)[1516~1599]이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권응인이 「홍주 기녀의 노래[洪州妓謌謠]」라는 시를 지었다. “인생의 득의함은 남북이 없나니/ 선연동 혼백은 되지 말아야지[人生得意無南北 莫作嬋娟洞裏魂].” 심수경이 크게 칭찬하며 누구의 작품인지 묻자 기녀가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심수경이 평소에 그 이름을 들었으므로 초청하여 술상을 차려 놓고 시를 지었다. 권응인이 시를 지어, “백설가 전하기에 알아듣기 오래건만/ 푸른 구름길을 막아 만나기가 늦었다네[歌傳白雪知音久 路阻靑雲識面遲].”라고 하였다. 심수경이 손을 잡고, “그대의 재주가 이 경지에 이르렀구나!”하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어우야담(於于野談)』·『기문총화(記聞叢話)』·『자해필담(紫海筆談)』 등에 심수경과 관련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시평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국내에서는 조식(曺植)을 제일로 꼽았고, 중국에서는 소동파(蘇東坡)를 높이 숭상하였다. 서얼 출신 문인으로 박지화(朴枝華)·어숙권(魚叔權)·조신(曺伸)·이달(李達)·정화(鄭和)·임기(林芑)·양대박(梁大樸)·김근공(金謹恭)·송익필(宋翼弼) 형제·이산겸(李山謙)·홍계남(洪季男)·유극량(劉克良)·권정길(權井吉) 등과 함께 거론될 정도였다. 사망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임진왜란 직전까지 활약한 인물로 추정된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송계집(松溪集)』이 있으며, 그 밖의 저서로 1588년(선조 21)경에 지은 『송계만록(松溪漫錄)』 상하 2권이 있다. 『송계만록』의 상권에는 시화, 하권에는 시화 및 잡기·설화 등이 수록되어 있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