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5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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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慶興 |
영어공식명칭 | Gwak Gyeongheung |
이칭/별칭 | 여긍(汝兢),구거당(九居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우인수 |
[정의]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성주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한 유학자.
[가계]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여긍(汝兢), 호는 구거당(九居堂). 청백리 곽안방(郭安邦)의 6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곽헌(郭櫶)이며, 아버지는 곽종길(郭宗吉)이다. 부인은 광주 이씨(廣州李氏) 이문경(李文景), 처부는 이산악(李山岳)이다.
[활동 사항]
곽경흥(郭慶興)[1569~1621]은 1569년(선조 2)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에서 태어났다. 박성(朴惺)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근본으로 삼아 유학의 경전을 탐독하였다. 김수침(金壽忱)·곽준(郭䞭)·곽재우(郭再祐)·조호익(曺好益)과 더불어 사귀었다. 후배였지만 모두가 벗으로 인정하여 따르며 노닐기를 더욱 독실하게 했고, 세상에서 한 시대의 어진 선비라고 일컬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저씨뻘인 곽재우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관찰사 김수(金晬)의 미움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김성일(金誠一)이 학행으로 초계 군수에게 천거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생원시에 3등 5위, 즉 100명 중 35등의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1612년(광해군 4)에 다시 과천현감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613년에는 사헌부 지평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김굉필(金宏弼)의 덕행과 학문을 사모하여 고을 선비들과 도동서원(道東書院)을 창건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남명집(南溟集)』의 발문을 지어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을 배척하자 편지를 보내 그 잘못을 논변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저서는 『구거당문집(九居堂文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 산30에 있다.
[상훈과 추모]
2011년 대구 국가 산업 단지 조성 공사 때 이장된 곽경흥·이문경 부부 묘에서 도포, 버선, 속바지 등 복식류 16점이 출토되었고, 후손이 기증하여 국립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복식품들은 390여 년간 매장된 탓에 조직이 약해지고 오염이 심한 상태였지만, 약 2년 동안 이뤄진 보존 처리 작업으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