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5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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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碧珍李氏 |
영어공식명칭 | Byeokjin Yi Clan |
이칭/별칭 | 명경 이씨(明經李氏),산화 이씨(山花李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초전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영나 |
본관 | 벽진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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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
세거|집성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 |
성씨 시조 | 이총언 |
입향 시조 | 이총언 |
[정의]
이총언을 시조와 입향조로 하는 성주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시조인 이총언(李悤言)이 신라 말 벽진군[현 경상북도 성주군의 옛 이름]의 태수였을 때 고려 태조를 도와 큰 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 개국원훈(開國元勳) 벽진장군(碧珍將軍)에 봉해지면서 벽진을 관향으로 하는 벽진 이씨가 되었다.
[연원]
벽진 이씨(碧珍李氏)는 이총언이 시조이다. 경상북도 성주가 본거지였기 때문에 후손들이 모두 성주를 중심으로 분파하였다. 6세 이실(李實)까지는 벽진에 거주했고, 7세 이방화(李芳華) 때 유곡(酉谷)으로 옮겼다. 경상북도 성주 외에 김천의 지례, 의성, 고령 등에도 거주하였다. 고려 조에 이견간(李堅幹)[?~1330]이 매우 뛰어난 문장으로 문명(文名)을 날리면서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이견간은 자가 직경(直卿), 호는 국헌(菊軒)이고, 산화 선생(山花先生)이라고도 하였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3대에 걸쳐 민부상서(民部尙書), 진현관 대제학(進賢官大提學) 등을 지냈다. 충선왕 때는 사신으로 원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조선 때 후손으로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이맹전(李孟專)[1392~1480]이 있다. 이맹전의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427년(세종 9)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정언(正言), 거창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관직에서 물러났고, 김시습(金時習)[1435~1493], 남효온(南孝溫)[1454~1492]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렸다. 이견간의 후손들은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월곡(月谷)에 거주했다가, 1400년대 초 자연재해로 폐허가 되어 다른 지역으로 옮겼다. 이후 200여 년이 지나고, 이견간의 셋째 아들 이수지(李粹之)의 후손인 완석정(浣石亭) 이언영(李彦英)[1568~1639] 때부터 다시 들어와 살게 되었다.
[입향 경위]
신라 말 이총언이 벽진군의 태수로 있다가 고려 태조를 도우며 큰 공을 세워 벽진장군이 되었고, 이후로 계속 벽진에 거주하였다.
[현황]
2010년 6월 말 기준으로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명곡, 어은에 70호의 벽진 이씨가 있다.
[관련 유적]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 경수당(敬收堂) 사우인 비현사(丕顯祠)가 있고, 시조인 이총언을 제사 지낸다.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에는 1750년(영조 26)에 세워져 이견간을 모시던 문곡서원(汶谷書院)이 있다. 1871년(고종 8)에 훼철이 되었다가 1989년에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