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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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太極問辨 |
영어공식명칭 | Answer of Tai-Ji[Great Ultimate] |
이칭/별칭 | 『태극문변록(太極門辨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추제협 |
편찬 시기/일시 | 1622년 - 『태극문변』 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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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 시기/일시 | 1623년 - 『태극문변』 간행[1623] |
간행 시기/일시 | 1662년 - 『태극문변』 간행[1662] |
간행 시기/일시 | 1667년 - 『태극문변』 간행[1667] |
소장처 | 청사 도서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청사도서관길 13[경산리 229] |
소장처 | 계명대학교 동산 도서관 -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구벌대로 1095[신당동 1000-2] |
간행처 | 옥산서원(玉山書院)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옥산리 7] |
간행처 | 회연서원(檜淵書院)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동강한강로 9[신정리 258] |
성격 | 고전적|고문헌 |
저자 | 이언적(李彦迪)[1491~1553] |
편자 | 정구(鄭逑)[1543~1620] |
간행자 | 이준(李浚) |
권책 | 2권 1책 |
행자 | 10행 18자 |
규격 | 29.3×20.2㎝ |
어미 | 상하내향사판화문흑어미(上下內向四瓣花紋黑魚尾) |
권수제 | 태극문변(太極問辯) |
판심제 | 태극문변(太極問辯) |
[정의]
성주 출신의 학자 정구가 1622년 편찬한 이언적의 태극논변서와 관련 문헌을 발췌한 논변서.
[개설]
『태극문변(太極問辨)』은 정구(鄭逑)[1543~1620]가 이언적(李彦迪)[1491~1553]과 손숙돈(孫叔暾), 조한보(曹漢輔)의 ‘태극설(太極說)’에 대한 논변서에다 이 논란의 출발점인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주희(朱熹)의 『태극해의(太極解義)』를 싣고, 여기에 주희와 육구소(陸九韶), 육구연(陸九淵)의 주륙논쟁 중 태극 관련 논변서를 더하여 찬집한 저작이다.
[저자]
이언적(李彦迪)[1491~1553]은 자가 복고(復古)이며 호는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이다. 15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 사헌부 정령 등을 역임했다. 1530년 김안로의 등용에 반대하다 관직해서 물러나 경주의 자옥산에 머물며 학문에 전념했다. 1537년 김안로의 몰락과 함께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홍문관 교리, 전주부윤, 이조 판서, 좌찬성 등을 지냈다. 1545년 을사사화 때 벼슬을 그만두었으나 이어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편찬/간행 경위]
이준(李浚)[1540~1623]은 선조인 이언적의 유문을 보존 및 선양하기 위해 이언적이 손숙돈, 조한보와 태극에 대해 논한 다섯 편의 글을 모아 이황과 정구에게 질정을 구했다. 이황은 크게 찬탄했으며, 정구는 주돈이의 「태극도설」과 주륙 논쟁 중 태극에 관련된 글을 합본하여 간행함으로써 주돈이 이래 태극설의 정통을 세우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이에 1623년 김지남(金止男)[1559~1631]의 주선으로 안동 화산부에서 초간본이 간행되었고 1662년에 옥산서원에서 중간했다. 그러나 이 두 본에 여러 오류로 인해 1667년 다시 체제와 교정을 거쳐 회연서원에서 개간되었다.
[형태/서지]
2권 1책의 목판본(木版本)이다. 판식은 사주쌍변(四周雙邊)으로, 계선이 있으며, 상하내향사판화문흑어미(上下內向四瓣花紋黑魚尾)이다. 크기는 29.3×20.2㎝, 반곽의 크기는 21.0×16.3㎝이다. 1면 10행에 1행의 자수는 18자이다. 권수제와 판심제는 ‘ 태극문변(太極問辯)’이다. 주석은 쌍행(雙行)이다. 장정법은 선장본(線裝本), 지질은 저지(楮紙)[닥종이]이다. 현재 성주의 청사 도서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한국국학진흥원,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중간본인 옥산서원본과 개간본인 회연서원본이 주류를 이룬다. 이는 모두 2권 1책의 목판본으로, 둘의 구성은 동일하고, 내용에서도 대동소이한 것으로 보아 일부 교정만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선본(善本)에 가까운 것은 이전 오류를 수정한 회연서원본으로, 본서는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본이다.
[구성/내용]
『태극문변』은 상하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에 1622년에 쓴 이정구(李廷龜)의 서문과 주돈이의 「태극도설」, 주희의 『태극해의』를 그대로 옮겨 차례로 배치했다. 이어 상권에는 주희와 육구연의 주륙논쟁 중 태극설과 관련된 주요 편지, 즉 주희의 「답육자미[구소]서(答陸子美[九韶]書)」, 「답육자미서(答陸子美書)」, 「답육자정[구연]서(答陸子靜[九淵]書)」, 「답육자정서(答陸子靜書)」와 육구연의 「여주원회서(與朱元晦書)」, 「여주원회서(與朱元晦書)」를 실었다. 이 중 육구소에게 보낸 답서는 모두 1186년, 주희 나이 57세에 작성한 것이며, 육구연에게 보낸 답서는 전자가 1188년에, 후자가 1189년에 보낸 것이다. 주요 내용은 태극에 대한 ‘무극(無極)’의 유무와 관련된 것으로, 주희는 태극에 무극을 더함으로써 리의 참된 본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한 반면 육구연은 태극에 이미 리의 의미를 함유하여 달리 무극이란 노자의 말이 필요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하권에는 이언적과 조한보의 태극 논쟁 중 이언적의 주요 편지, 즉 「서망재망기당무극태극후설(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 「답망기당제일서(答忘機堂第一書)」, 「답망기당제이서(答忘機堂第二書)」, 「답망기당제삼서(答忘機堂第三書)」, 「망기당제사서(答忘機堂第四書)」를 담았다. 이는 현재 『회재집(晦齋集)』권5 잡저(雜著) 부분에 실린 그대로이며, 조한보의 편지가 남아있지 않기에 이언적의 편지를 중심으로 실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언적과 손숙돈, 조한보의 논쟁은 상권에 제시된 대립된 견해의 연장선상에서, 특히 마음공부의 문제와 연결하여 이언적은 주희의 주장을 계승하여 이들이 불교나 노장의 설에 치우친 해석을 비판하면서 리의 참된 본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존양성찰(存養省察)을 통해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권미에는 1623년에 쓴 김지남의 「화산구간태극문변발(花山舊刊太極問辨跋)」, 장현광의 「발(跋)」과 「후지(後識)」, 그리고 「고정칙(考訂則)」을 덧붙였다.
[의의와 평가]
『태극문변』은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태극설(太極說)’을 중심으로 정학(正學)과 도통(道統)의 확립을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는 저작이다. 이황이 『성학십도(聖學十圖)』의 1도에 「태극도(太極圖)」를 배치한 것도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후 관련 문헌들이 다수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