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4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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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武屹精舍藏書閣所藏典籍 |
영어공식명칭 | Publications, Collection of Jangseogak in Muheuljeongsa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미진 |
[정의]
성주 출신 한강 정구가 건립한 무흘정사 내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던 전적 일체.
[개설]
무흘정사(武屹精舍)는 현재 행정 구역상 경상북도 김천시 소재이나 성주군 가천면과의 경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무흘정사는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가 처음 건립하여 장서를 하던 곳인데, 정구 사후 그의 제자들과 성주의 선비들이 중심이 되어 장서각이란 건물을 새로 지음으로써 무흘정사와 장서각을 분리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이건을 거듭하다 1854년 큰 화재로 무흘정사와 장서각이 소실되었고, 1862년에 이전과 같은 규모로 새로 지었다고 한다.
[형태/서지]
무흘정사의 장서 목록은 정우락이 기존 자료를 참고하여 조사한 내용에 의거한 바, 고문헌이 78종 507책, 책판이 6종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구성/내용]
조사 내용에 의거하여 무흘정사 장서각 소장 전적의 특징을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정구가 당시 직접 열람하고 학습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서적으로,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와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設分類)』를 비롯해서 『고금인물지(古今人物志)』, 『수사언인부록(洙泗言仁附錄)』, 『심경발휘(心經發揮)』, 『주자시분류(朱子詩分類)』, 『고금명환록(古今名宦錄)』, 『심의제조법(深衣制造法)』, 『경현속록(景賢續錄)』등이 있는데, 자신의 선대의 유문을 편집한 『서원세고(西原世稿)』 8권 2책도 여기에 포함된다. 『서원세고』는 1607년경 목판으로 제작된 것인데 그의 9대조 정보[1309~1345], 8대조 정추(鄭樞)[1333~1382], 7대조 정총(鄭摠)[1374~1413] 등 3대의 문집을 합집(合集)하여 간행한 것이다.
소장 전적 가운데에는 조선 서적보다 중국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41종 397책으로 전체 서적의 78.3%에 해당한다. 왕희명(王希明)이 쓴 『단원자보천가(丹元子步天歌)』 등 당서(唐書)가 4종 81책, 사량좌(謝良佐)가 지은 『상채선생어록(上蔡先生語錄)』 등 송서(宋書)가 19종 211책, 행균(行均)이 쓴 『용감수감(龍龕手鑑)』 등 요서(遼書)가 1종 4책, 정단례(程端禮)가 지은 『분년일정(分年日程)』 등 원서(元書)가 1종 2책, 양렴(楊廉)이 지은 『황명리학명신언행록(皇明理學名臣言行錄)』 등 명서(明書)가 13종 87책이 있다. 조선 서적의 경우 전기 인물에 집중되어 있는데, 정조가 영외(嶺外)에서 임진왜란 전의 서책을 찾자 무흘정사 소장 목록을 조정에 올렸을 정도로 전기의 문집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권근(權近)[1352~1409], 김수온(金守溫)[1409~1481], 신숙주(申叔舟)[1417~1475], 김맹성(金孟性)[1437~1487], 박한주(朴漢柱)[1459~1504], 류숭조(柳崇祖)[1452~1512], 남효온(南孝溫)[1454~1492], 권오복(權五福)[1467~1498], 어득강(魚得江)[1470~1550], 주세붕(周世鵬)[1495~1554] 등의 문집이 여기에 해당된다.
소장 서적은 주로 성리서, 역사서, 문학서, 예서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성리서로는 『상채선생어록』,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주자대전(朱子大全)』, 『회암사수(晦庵辭受)』, 『주자성서(朱子成書)』, 『여동래집(呂東萊集)』, 『횡거경학이굴(橫渠經學理窟)』, 『분년일정』, 『황명리학명신언행록』, 『설문청공독서록(薛文淸公讀書錄)』, 『이단변정(異端辯正)』, 『입학도설(入學圖說)』, 『퇴계고봉양선생왕복서(退溪高峰兩先生往復書)』 등이 있다. 역사서 내지 지지(地誌)로는 『계고록(稽古錄)』, 『통지략(通志略)』, 『역대통감찬요(歷代通鑑纂要)』, 『궐리지(闕里誌)』, 『동사찬요(東史纂要)』,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경산지(京山志)』 등이 있으며, 문학서로 『문원영화(文苑英華)』, 『문장변체(文章辨體)』, 『문장정종(文章正宗)』, 『숭고문(崇古文)』, 『고문주기(古文珠璣)』 등이, 예서로는 『의례주소(儀禮注疏)』, 『예기주소(禮記註疏)』, 『의례도(儀禮圖)』, 『의례경전(儀禮經傳)』, 『향사지례(鄕射之禮)』 등이 장서되어 있었다.
무흘정사에는 정구가 그의 문도들과 주고받은 다양한 고문서도 보관되어 있었다. 서사원(徐思遠)[1550~1615]의 『낙재집(樂齋集)』을 편찬할 때, 배상룡(裵尙龍)이 무흘정사의 서감(書龕)에서 서사원이 정구에게 올린 간찰을 찾아 도성유에게 전해 준 것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배상룡은 서사원이 정구에게 보낸 사의(辭意)가 평범한 안부 편지를 훨씬 넘어서기 때문에 원집(元集)의 첫 머리에 실어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배상룡, 『등암집(藤庵集)』권2 「여도해중(與都諧仲)」]. 이 밖에도 『한강속집』을 만들면서 정구의 후손인 정주석(鄭胄錫)·정윤석(鄭允錫)·정호영(鄭浩永) 등이 무흘정사에서 정구와 그 제자의 문답을 구하여 홍직필(洪直弼)[1776~1852]에게 보내 『한강속집』의 발문을 의뢰하는 등 무흘정사 장서각에는 정구와 그의 문도들 사이에서 오고갔던 간찰 등 다양한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었다.
[의의와 평가]
무흘정사 장서각에는 20세기 중반까지 정구의 수택본이 다량 남아 있었으며, 조선에서 출간된 중국서가 특별히 많았다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서적이 많았다는 점은 연구 대상으로서 매우 특기할 만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정구 사후 무흘정사는 산중 도서관 역할을 해냄으로써 정구 문인들의 강학 활동의 중심지로 기능했다는 점도 유념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