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488 |
---|---|
한자 | 星州鄕校通文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미진 |
[정의]
1875년 4월 10일 성주향교에서 성주 고을의 각 문중에 보낸 통문.
[제작 발급 경위]
「성주향교 통문」은 1875년 3월 10일 성산 이씨(星山李氏) 문중이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2]의 강학 장소인 만귀정(晩龜亭) 중수를 위해 회연서당(檜淵書堂)에서 계를 조직하여 관련 인사 총 59명이 연명(聯名)을 한 뒤 성주향교에 통문(通文)[여러 사람의 성명을 적어 차례로 돌려 보는, 통지하는 문서]을 보냈고, 한 달 뒤인 1875년 4월 10일 성주향교에서 만귀정 중수 사업에 도움을 주고자 성주 고을의 각 문중에 관련 회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 2건이다.
[형태]
필사본으로, 한 건은 74×57㎝ 크기의 낱장 형태이고, 다른 한 건은 102×57㎝ 크기의 낱장 형태이다. 재질은 종이이며 한자로 작성되어 있다.
[구성/내용]
1875년에 3월에 성산 이씨 문중이 만귀정 중수를 위해 회연서당에서 계를 조직한 뒤 중수 사업에 도움을 받기 위해 성주향교에 통문을 보내자, 이를 받아 본 성주향교는 다음 달 4월에 각 문중에 관련 논의로 회의를 소집하기 위해 통문을 보냈으니 이것이 바로 「성주향교 통문」이다. 만귀정은 현재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에 위치한 정자로, 성산 이씨 출신 이원조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1851년부터 성주에 머물며 만귀정을 지어 고을 후생들을 위해 강학 활동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마루에 비가 스며들고 벽에 이끼가 끼는 등 보수가 시급하여 성주향교의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성주향교 통문」의 내용에 의하면, “그는 정사(精舍)를 가야산(伽倻山) 석천(石泉)에 세우고 일 년 내내 강학을 그만두지 않아 고을과 영남의 사림이 모여들고, 원근에서 그 감화를 입었으니 그의 자취는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세상사가 변하여 인사(人事) 역시 변한지라 만귀정이 옛날의 광경을 보존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본가 후손만의 책임이 아니기에 실로 전 고을이 부끄러워 해야 할 점이다. 이에 고을의 준엄한 의논이 필요하니 고을의 각 가문에게 고하여 회의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여러분들은 응해 주길 바란다.”라고 하였다. 본 통문에 연명한 사람은 직원(直員) 이기철(李基澈), 장의(掌議) 박경동(朴景東) 등을 비롯한 98명이다.
[의의와 평가]
1875년 3월에 회연서당에서 작성한 통문과 함께 성주 지역 재지사족들의 위상과 활동 모습을 여실히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료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