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4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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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星州凝窩宗宅 |
이칭/별칭 | 북비 고택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23-16[대산리 42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도영 |
건립 시기/일시 | 1721년 - 성주 응와 종택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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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821년 - 성주 응와 종택 안채·사랑채 증축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45년 - 성주 응와 종택 북비채 중건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66년 - 성주 응와 종택 사랑채 개축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99년 - 성주 응와 종택 솟을대문 증축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10년 - 성주 응와 종택 사당 증축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3년 6월 20일 - 성주 응와 종택 경상북도 민속 문화재 지정 |
현 소재지 | 성주 응와 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23-16[대산리 421] |
성격 | 종택|전통 가옥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북도 민속 문화재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종택.
[개설]
성주 응와 종택(星州凝窩宗宅)은 처사(處士) 이이신(李爾紳)과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호위 무관이었던 아들 이석문(李碩文)이 1721년(경종 1)에 터전을 잡은 곳이다. 억울하게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 세자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이석문이 북쪽으로 문을 낸 것에서 유래하여 북비 고택(北扉古宅)으로도 불린다. 무신으로서 사도 세자에게 충의를 다한 이석문과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은율현감을 지낸 이규진(李奎鎭),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공조판서(工曹判書)·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낸 이원조(李源祚) 등 국가의 동량이 된 인물을 배출하였다. 특히 이원조는 학자적 소양과 경륜가로서의 능력을 함께 겸비한 학자 출신 관료로서, 영남 주리학의 이론 정비와 학통의 수수에 기여한 인물이다.
[위치]
성주 응와 종택은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23-16[대산리 421번지]에 있다. 성주 한개 마을의 북쪽 산기슭 아래에 대산동 교리댁(大山洞校理宅)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위치한다.
[변천]
1721년(경종 1)에 처사 이이신이 처음으로 터를 잡았고, 1821년(순조 21)에 손자 이규진이 안채와 사랑채를 새로 지었다. 이후 증손자인 공조판서 이원조가 1845년(헌종 11)에 사랑채인 사미당(四美堂)과 경침와(警枕窩)를 갖추고 폐허가 된 북비채를 중건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다. 사랑채는 1866년(고종 3)에 다시 지었다. 1899년(고종 36)에 대문을 솟을대문으로 증축하였고, 1910년(순종 4)에 사당을 증축하는 등 몇 차례 증개축을 하였다.
[형태]
일반적인 양반 가옥의 구조인데, 다만 남성의 공간을 동쪽에 두고 여성의 공간을 서쪽에 두는 유교적 이념은 찾아볼 수 없다. 안채와 사랑채, 사당, 안사랑채, 대문채, 북비택 등이 동서로 배치된 형태이다. 원래는 안채와 사랑채를 비롯하여 장판각, 안대문채, 마구간, 아래채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안채는 5칸의 전후퇴 집으로 동쪽으로부터 부엌 1칸, 안방 2칸, 대청 2칸, 건넌방 1칸으로 이루어졌다. 없어진 안대문채는 중문간채와 방앗간, 고방 등으로 이루어진 6칸으로 안채 맞은편 남쪽에 있었으며, 아래채는 안채에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사랑채와 안채가 ‘口’ 자형을 보이고 있으며, 솟을대문이 남아 있어 당시 양반 가옥의 특징을 알 수 있다. 또 사당을 별도의 공간에 두지 않고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배치하였으며, 독립성이 강한 북비택은 후학을 위한 강학당으로 활용하였다.
[현황]
성주 응와 종택은 1983년 6월 20일에 경상북도 민속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성주 응와 종택은 건립 연대를 알 수 있는 건물로, 당시 상류층 양반 한옥의 구조와 조선 시대 주택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지역적인 특색이 반영된 공간 배치를 하면서도 구한말에 유행하였던 건축 양식들이 많이 반영된 건축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