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4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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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龜岡齋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성주로 1037[봉두리 산52-1]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지아 |
건립 시기/일시 | 1558년 - 구강재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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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96년 - 구강재 성주군 금수면 성주로 1037[봉두리 산52-1번지]로 이건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3년 11월 30일 - 구강재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지정 |
현 소재지 | 구강재 -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성주로 1037[봉두리 산52-1] |
성격 | 재실 |
양식 | 팔작지붕집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2칸 |
관리자 | 성주 여씨 월회당 종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봉두리에 있는 조선 전기 재실.
[개설]
구강재(龜岡齋)는 여희림(呂希臨)[1481~1553]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재실이다. 여희림의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천지(天之), 호는 원정(圓亭)이다. 김안국(金安國)·소세양(蘇世讓)·정사룡(鄭士龍) 등과 교유하였다. 1507년(중종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516년(중종11)에 고향에서 주자(朱子)가 가감, 증보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하였다. 의흥현감(義興縣監), 창녕현감(昌寧縣監) 등을 지냈다. 1517년(중종 12)에 복성군(福城君)의 사부가 된 적이 있었는데, 1533년(중종 28)에 그것이 빌미가 되어 귀양을 갔다. 이후 1538년(중종 33)에 재등용되어 지평(持平)에 올랐다. 구강재는 원래 여희림이 아버지 여우창(呂遇昌)의 시묘살이를 하던 장소에 건립하였는데, 아버지의 묏자리가 강에서 놀던 거북이 알을 낳기 위해 오르는 형국이라는 데에서 구강재라는 이름이 연유하였다.
[위치]
구강재는 성주군 금수면 성주로 1037[봉두리 산52-1번지]에 있다. 성주군 금수면의 최하단부, 성주댐을 따라가는 길인 성주로의 오른쪽에 ‘구강재’ 표지석이 있고, 표지석을 따라 올라가면 구강재가 있다.
[변천]
구강재는 1558년(명종 13)에 후손들이 여희림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1996년 성주댐 건설로 원래 있던 자리가 수몰 지역에 포함되어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형태]
재실과 관리사 2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ㄱ’ 자형 배치를 이룬다. 재실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좌측부터 마루 1칸, 온돌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황]
구강재는 1993년 11월 30일에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였으며, 성주 여씨 월회당 종중(星州呂氏月會堂宗中)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중국 송나라 때 남전 여씨(藍田呂氏) 형제 네 사람이 향인(鄕人)들과 함께 맺은 규약인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을 본받아 여희림이 남전여씨향약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구강재는 이러한 여희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재사로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