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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99
한자 李碩文神道碑
영어공식명칭 Memorial Stone of I Seokmun
이칭/별칭 돈재 이석문 신도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299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은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09년 10월연표보기 - 이석문 신도비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713년 - 이석문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773년 - 이석문 사망
현 소재지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299 지도보기
성격 신도비
양식 입비
관련 인물 이석문|곽종석|김성근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140㎝[높이]|70㎝[너비]|26㎝[두께]

[정의]

사도 세자의 호위 무관이었던 이석문을 기리기 위해 1909년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세운 비.

[개설]

이석문(李碩文)[1713~1773]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자는 사실(士實), 호는 돈재(遯齋), 별호는 북비공(北扉公)이다. 1713년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 마을에서 태어났다. 한개 마을성산 이씨 집성촌으로 아버지는 이이신(李爾紳), 어머니는 야성 송씨로 첨사 송원기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조예가 깊고 궁술과 마상 무예가 무리에서 뛰어났다. 1739년(영조 15)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742년 부장(部將)이 되었다가 병환으로 사직 후 5년 후인 1747년 다시 부장에 임명되었다. 평안도 강계군 추파진의 권관(權管)으로 재직 중 직속상관의 비리에 분개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나 1750년 다시 임용된 후 사도 세자에 발탁되어 어모장군 행무신 겸 선전관(禦侮將軍行武臣兼宣傳官))에 기용되고 후일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되었다. 1762년(영조 38) 사도 세자의 구명을 꾀하다 곤장을 맞고 파직된 후 낙향하였다. 그는 무괴지심(無愧之心) 즉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이라는 글을 짓고 평생 은거하였다. 후일 그의 충절이 재평가되고 1849년(헌종 15) 증 어모장군 훈련원정으로 증직되었다가 1871년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다시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여러 번 추증되었다. 증손이 이원조이다.

[건립 경위]

이석문 신도비(李碩文神道碑)는 1762년(영조 38) 사도 세자의 구명을 꾀하다 낙향한 후에도 충절을 지킨 이석문의 절개와 그의 덕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1909년(순종 3) 10월에 건립하였다.

[위치]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한개 마을 성주 응와 종택[북비 고택]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

[형태]

신도비각은 단칸,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신도비의 전체 높이는 290㎝로 귀부, 비신, 이수를 갖춘 일반적인 형태이다. 이수에는 쌍룡문과 운문, 하단의 여의두문으로 새겼다. 귀부는 원형에 가깝고 귀갑은 육각형과 마름모꼴을 연속하여 새겼다. 측면 아래에는 거북의 앞발, 뒷발을 돋을새김으로 표현하였다. 비신은 높이 140㎝, 너비 70㎝, 두께 26㎝이다.

[금석문]

이석문 신도비는 한말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포산 곽종석(郭鍾錫)이 글을 짓고, 구한말 관료이자 서예가인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는 그의 가계와 무신으로서의 공적, 품행이 기술되었고 특히 임오화변 때 사도 세자의 구명을 꾀하기 위한 행적과 후일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낙향한 후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사립문을 철거하여 북쪽으로 대문을 내고 말하길 ‘북극성[임금을 칭함, 『논어』 위정]을 우러러보는 뜻이고 시류에 영합하는 자들과 접촉하고 싶지 않다’라 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북비가(北扉家)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황]

이석문 신도비는 석재 보호 시설로 둘러져 있다.

[의의와 평가]

성주 출신 조선 후기 무신 돈재 이석문의 품행과 공적이 잘 나타나 있는 신도비로 지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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