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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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士龍神道碑 |
영어공식명칭 | Memorial Stone of I Sary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602-3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신소윤 |
건립 시기/일시 | 1900년 4월 - 이사룡 신도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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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602-3 |
성격 | 신도비 |
양식 | 입비 |
관련 인물 | 이사룡|이종기|정재교|송홍래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57㎝[높이]|51㎝[너비]|20㎝[두께]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의롭게 죽은 이사룡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1900년에 세운 비.
[개설]
이사룡(李士龍)[1612~1640]의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임중(任中), 호는 괴정(槐亭)이다. 1640년(인조 18) 청나라가 명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조선에 군사를 요청하였을 때 포수(砲手)로 징발되었다. 금주(錦州)의 전투에서 명나라의 은혜를 생각하여 탄환을 뺀 채 쏘았다가, 청나라 병사들에게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후에 성주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건립 경위]
이사룡의 죽음을 의롭게 여긴 조정에서 1793년(정조 17)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추증하고 정려를 내리라는 정조의 전교가 내려졌다. 이에 3년이 지난 1796년 ‘충렬사’라는 편액과 정려 및 정조가 지은 제문(祭文)이 하사되었다. 마을에 정려문(旌閭門)이 건립되었다. 이사룡 신도비는 1900년 4월에 11세손 이홍기(李鴻基)[?~?]가 이사룡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위치]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602-3번지에 있다. 성주군 용암면 대봉2리 옥천서원(玉川書院)으로 가는 길에 ‘성산 이씨 세거지(星山李氏世居地)’라는 표지석이 있는 도로변 산기슭에 정려각이 있는데, 이사룡 신도비는 이사룡 정려각의 서쪽에 있다.
[형태]
높이 157㎝, 너비 51㎝, 두께 20㎝이다.
[금석문]
비문은 이홍기의 부탁으로 이종기(李種杞)[1837~1902]가 짓고, 전액(篆額)은 정재교(鄭在敎)[?~?]가 썼으며, 글씨는 송홍래(宋鴻來)[1866~1953]가 썼다. 이사룡의 절의를 찬양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대명충신 조선의사 증 성주목사 이사룡지려(大明忠臣朝鮮義士贈星州牧使李士龍之閭)’라는 현판이 걸린 비각의 서쪽에 있다.
[의의와 평가]
이사룡은 명나라를 향한 의리를 지키다가 청나라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이를 알게 된 명나라 장군 조대수(祖大壽)[?~1656]가 ‘대명충신(大明忠臣) 조선의사(朝鮮義士)’라고 써서 장대에 내걸었으며, 청나라도 이사룡의 절의(節義)에 감탄하여 조선에 유체를 돌려주고 산하이관[山海關][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있는 관문으로, 예로부터 군사 요충지임]에 표석을 세우게 하였다고 한다. 이사룡의 절의는 후대 사람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어 송시열(宋時烈)은 「포수 이사룡전(砲手李士龍傳)」을 짓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