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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86
한자 海東淸風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478-2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도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36년연표보기 - 해동청풍비 건립
보수|복원 시기/일시 1946년 - 해동청풍비 재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860년 - 장기석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911년 - 장기석 사망
문화재 지정 일시 1990년 8월 7일연표보기 - 해동청풍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
현 소재지 해동청풍비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478-2 지도보기
성격 기적비|사적비
양식 입비
관련 인물 장기석|김창숙|김구
재질
크기(높이, 너비, 두께) 320㎝[높이]|110㎝[너비]|45㎝[두께]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북도 기념물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에 있는 일제에 저항하다 순절한 장기석을 기리기 위해 1936년에 세운 비.

[개설]

장기석(張基奭)[1860~1911]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몹시 가난하여 공부를 하지 못하다가 39세의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여 43세에 학문을 두루 통달하였다. 그 뒤 후진 양성을 위한 교육에 힘썼다. 일제 때 경찰서장으로부터 경축식에 참석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절하여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단식을 시작하다가 의식을 잃기도 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들이 억지로 음식을 먹이려 하자 완강히 거부하다 그릇으로 서장을 때려 옥중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건립 경위]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에 비분강개하여 향중 사회에 항일 의식을 고취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잔혹한 위협과 집요한 회유에도 동요하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 순절한 자하(紫下) 장기석 의사를 기리기 위하여 1936년 유림들이 뜻을 모아 해동청풍비(海東淸風碑)를 건립하였다. 해동청풍비는 1937년 항일 정신을 고취하는 의미를 감지한 일제 경찰들에 의해 파괴되어 계천(溪川)에 버려졌다가 1946년 유림들이 수습하여 다시 세웠다. 해동청풍비의 곁에는 일본 경찰이 비석을 파괴하려 하자 자결로써 항거한 장기석의 부인 박씨의 기열비(紀烈碑)가 함께 세워져 있다.

[위치]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봉계3리 마을 회관에서 서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형태]

비석은 평평한 바닥돌 위에 비신을 세운 간단한 형태로 이수(螭首)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비신(碑身)은 높이 320㎝, 너비 110㎝, 두께 45㎝의 규모로 되어 있으며, 현재의 비신은 건립된 뒤 일경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다시 수습하여 복원했기 때문에 당초 파괴할 때의 흔적과 다시 맞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금석문]

비신의 앞면에는 ‘해동청풍(海東淸風)’ 네 자가 큰 글자로 깊게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1946년 수습 복원하였을 때, 비석의 건립 경위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짓고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썼다.

[현황]

1990년 8월 7일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해동청풍비는 건립 연대가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비를 세우게 된 동기와 그 주인공인 장기석 의사의 충의와 절개, 왜경에 의한 파괴 및 그 파괴를 저지하기 위한 부인의 자결을 통한 항거, 광복 후 파괴된 비 조각을 수습하여 재건하고, 거기에 김창숙의 글과 김구의 글씨를 새겼다는 데서 역사적·교육적인 측면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 의열 문화유산이다.

[참고문헌]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 성주군 성주문화관광(https://sj.go.kr/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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