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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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外獨立運動基地建設 |
영어공식명칭 | Building Overseas Bases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 독립운동가 이승희와 김창숙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 운동.
[개설]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은 일제 강점기 초기인 1910년대에 연해주·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대표적인 주도 인물은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 등이었다. 1908년 5월 연해주로 망명한 이승희는 1909년에 만주로 이동하여 밀산부(蜜山府)의 한흥동(韓興洞), 남만주 단둥[丹東]의 접리수촌, 봉천부[현 선양]의 덕흥보(德興堡)를 개척하는 등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3월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김창숙은 1925년 봄부터 북만주의 내몽골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계획하고, 1925년 8월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 활동의 한계와 사고로 인해 다시 상하이로 돌아가 의열 투쟁을 벌이던 나석주(羅錫疇) 등을 지원하였다.
[역사적 배경]
민족 독립 문제에 적극성을 가진 유림들이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때 보인 대응 방식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거나, 목숨을 던져 일제 침략의 부당성에 항거하는 것이 대표적 방식이었다. 성주 출신의 유림인 이승희와 김창숙은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방식으로 대응한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한계 이승희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
이승희는 1908년 5월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하여 이상설(李相卨)·안중근(安重根)·유인석(柳麟錫)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칠 방법을 찾았다. 1909년에는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만주로 이동하여 밀산부 봉밀산 일대에 한흥동이라는 마을을 개척하였다. 1913년에는 만주를 가로질러 안동현(安東縣)[현 단둥]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동삼성한인공교회(東三省韓人孔敎會)를 창립하고 북경공교회(北京孔敎會)에 편지를 보내 지회 승인을 요청하였다. 유교 윤리를 통해 전통문화의 정신을 계승·유지하면서 민족의 독립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1913년에는 펑톈[奉天] 덕흥보의 황무지를 개척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봄철의 해동기에 매입했던 땅이 물바다가 되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이승희는 펑톈 서탑에 머물면서 공교회 운동에 전념하다가, 1916년 2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심산 김창숙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
김창숙은 상하이에서 파리 장서를 프랑스로 보낸 뒤인 1919년 4월 유림 대표로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기 수립 과정에도 참여하였다. 1920년 11월에는 상하이에서 베이징[北京]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신채호(申采浩)·이회영(李會榮) 등과 가까이 지내면서 활동 방향을 찾았다. 국제 정세를 지켜보면서 단시일 내에는 독립 달성의 가능성이 낮을 것으로 판단하고, 독립운동의 역량을 키울 새로운 방안으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김창숙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 계획이 본격적으로 태동한 때는 1925년 봄이었다. 김창숙이 눈여겨 둔 곳은 러허[熱河], 치치하얼[齊齊哈爾], 내몽골 지역이었고, 대상지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에 들어갔다. 이몽경(李夢庚), 쉬첸[徐謙] 등 중국의 실력자와 협의했고, 쉬첸이 군벌 펑위샹[馮玉祥]과 논의하였다. 그 결과 내몽골 지역인 수원(綏遠)과 포두(包頭)의 개간 가능한 땅 3만 정보를 후보지로 물색하였다. 소요 자금 20만 원은 국내에서 모집하기로 하였다.
김창숙은 상하이에서 송영호(宋永祜)·이봉로(李鳳魯)·김화식(金華植) 등의 협조를 받아 주로 영남 지역 유림으로부터 자금을 모으기로 하였다. 1925년 6월 말 송영호를 국내로 먼저 침투시키고 자신은 8월 중순[음 6월 하순]에 국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면우집(俛宇集)』 간행을 위해 서울에 머무르고 있던 한주학파의 유생들을 만나는 등 자금 모집에 나섰다. 기대한 만큼 자금이 모이지 않자, 1925년 10월 하순경에 무력 사용을 결심하고 의열 단체 신건동맹단(新建同盟團)을 조직하였다. 신건동맹단은 모험단(冒險團)과 모집단(募集團)으로 편성되었고, 모집단은 담당 지역 1개소에 1천 원 이상을 요구하되, 불응할 때는 모험단의 존재를 알려 위협함으로써 쉽게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1926년 1월 군자금 모집에 한계가 드러난 상황 속에 대구에서 울산으로 이동하던 중 자동차가 언덕 아래로 굴러 허리에 절상(絶傷)을 당했고, 일제 경찰의 추적도 시작되었다. 그래서 서둘러 국내를 빠져나갔으나, 4월 2일에 김화식이 체포됨으로써 관련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바람이 불어 닥쳐 5월 중순까지 대부분의 관련자들이 붙잡혔다.
김창숙은 1926년 5월 상하이에 도착하여 그동안 모은 자금으로 의열 투쟁을 벌이는 쪽으로 활동 방향을 잡았다.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김두봉(金枓奉)·류자명(柳子明)·정원 등과 만나, 국내 인심이 죽어 있음을 설명하고, 회복을 위해서는 청년 결사대를 국내로 파견하여 총독부의 산하 기관들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의기를 고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김구가 추천한 나석주를 국내에 파견하여 1926년 12월 28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김창숙은 이 거사 뒤에 통증이 심해져 공동 조계에 있던 병원에 몰래 입원해 있다가 밀정의 밀고로 일경에 붙잡혀 국내로 옮겨졌다. 1927년 12월 징역 14년형을 선고받았고,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의 고문을 받아 하반신이 마비되며 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다.
[결과]
이승희와 김창숙의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후 한인의 집단적인 국외 정착지를 마련하는 기초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은 재만 한국 교민의 집단 정착지 마련을 통해 생활 안정을 도우며 독립운동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방안이었고, 이후 국외 독립운동의 중요한 근거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