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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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一八六六年義兵 |
영어공식명칭 | 1866 Year's Righteous Army |
이칭/별칭 | 의병운동,의병전쟁,의병투쟁,구국 무력투쟁,무력 구국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866년 10월 5일 - 1866년 의병 발생, 성주향교에서 의려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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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866년 11월 10일 - 1866년 의병 종결, 성주 지역 의려 해산 |
발단 시기/일시 | 1866년 9월 18일 - 병인양요 발생 |
발생|시작 장소 | 성주향교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2길 36-12[예산리 131] |
종결 장소 | 성주향교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2길 36-12[예산리 131] |
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이원조|이진상|여의주|이상준|여태행|이원효|송홍익|최영갑|여곤|정경|이해종|김종정|정윤석|이종희|윤익성|이문수|이발|성산 이씨 |
[정의]
1866년 병인양요 때 경상북도 성주에서 결성된 의병.
[개설]
1866년 10월 프랑스의 침략에 즈음하여 조정에서는 영남소모사(召募使)로 이종상(李鍾祥)과 정윤우(鄭允愚)를 파견하여 영남 각 지역에서 소모책을 차출하고 의려(義旅)를 규합하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영남 지방의 흥해(興海)[경상북도 포항 지역의 옛 이름]에서는 김천익(金千益), 청도에서는 박시묵(朴時黙), 상주에서는 유주목(柳疇睦)이 소모책으로 위촉되어 의려를 조직했고, 성주에서는 이원조(李源祚)[1792~1871]가 소모책으로 위촉되어 의려를 조직하였다.
[역사적 배경]
1865년 3월 한성판윤 이원조는 부인의 상을 당하고 나서 사직소를 올린 뒤 귀향하였다. 이원조의 나이 74세였다. 1809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한 지 57년 만의 귀향이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866년 프랑스 침략의 소식을 듣고, 향리 성주에서 의려를 결성하고 창의하였다.
[경과]
이원조는 조카 이진상(李震相)[1818~1886]과 함께 성주향교에 향회소를 차리고 통유문 「양란창의사통유일향문(洋亂倡義事通諭一鄕文)」을 돌려 창의를 준비하였다. 1866년 10월 5일 성주군 관내 40개 면에서 동지를 결속하여 의려를 조직하였다. 이때 작성된 『향회소 동약록(鄕會所同約錄)』[병인 시월 초오일(丙寅 十月 初五日)]에는 「통유문(通諭文)」과 「약서문(約誓文)」, 그리고 향회소 명부 및 동약록이 등재되어 있다. 향회소 명부에는 도총령(都摠領) 이원조를 비롯한 지휘부 33명, 도총솔(都摠率) 여의주(呂宜周)를 비롯한 16명, 향리 내 44개 마을의 총솔(摠率) 90명이 등재되어 있고, 「동약록」에는 150명이 등재되어 있다. 모두 약 300명이 명부에 실려 있다.
이원조 등은 10월 5일 향회에 참여한 고을 사람들과 함께 의려를 규합하여 조직을 갖추고 맹서하였다. 성주 유림은 향교에 모인 향회소의 구성원으로 의려를 조직하였다. 의려의 지도부는 전 판윤 이원조를 도총령, 전 교리 이상준(李翔俊)과 유학 여태행(呂台行)을 부총령(副摠領), 생원 이원효(李源孝)·송홍익(宋鴻翼)·유학 최영갑(崔永甲)·여곤(呂坤)을 찬획(贊畫), 생원 정경(鄭璥)·이해종(李海宗)·유학 김종정(金宗鼎)·정윤석(鄭允錫)·이종희(李宗熙)·윤익성(尹益成)·이문수(李文壽)·노덕철(盧德哲)[창녕인] 등을 참모로 하여 구성하였다. 그리고 유학 이발(李浡) 외 15명에게 양향(糧餉)을 맡게 했고, 여의주 외 16명을 도총솔로 삼았다. 그리고 성주군 관할 40면(面)에서 각각 2명~3명씩 선발한 90명을 총솔로 삼았다. 도총솔은 2개~3개 면을 각각 관할하고, 각 면을 담당한 총솔을 거느렸다. 총솔은 각 마을을 담당하여 조직을 갖추도록 하였다.
「동약록」에 등재하고 맹서한 동지는 150명이었다. 도총령 이원조는 조카 이진상을 비롯한 성주 한개 마을의 성산 이씨(星山李氏)들을 이끌고 참여했고, 그 외 참석 인사들은 성주 지역 일원에서 세거하던 사족 가문의 유력자와 각 마을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결과]
1866년 11월 10일 정부군의 반격을 받은 프랑스군이 강화도에서 물러났고, 이원조를 비롯한 성주 지역의 유생들은 의려를 해산하였다
[의의와 평가]
1866년 10월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점령하자, 경상북도 성주를 비롯한 상주·경주·청도·영일 등지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침략에 대응한 유생들의 위정척사 운동이다. 1866년 11월 프랑스군이 물러나면서 유생들도 의려를 해산했지만, 개항기 외세 침략에 대응한 최초의 의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