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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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衛正斥邪運動(星州) |
영어공식명칭 | Wijeongcheoksa Movement |
이칭/별칭 | 위정척사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개항기 성주 지역에서 전개된 위정척사 사상과 그 운동.
[개설]
위정척사 운동(衛正斥邪運動)은 개항기 성리학적 질서를 지키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한 운동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열강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감이 커지면서 대원군 정권과 그 지지 세력인 양반 유생들은 위정척사 운동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위정(衛正)은 주자학적 질서인 정(正)을 지킨다는 의미이고, 척사(斥邪)는 주자학 이외의 사상, 특히 서양의 사상이나 종교는 사악하고 나쁜 것이므로 배척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위정척사 운동은 천주교와 서양 문화를 주요 배격 대상으로 삼으며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1870년대에는 일본의 개항 요구에 대항해 왜양일체론을 등장시키며 개항 반대 운동으로 전개되었고, 1880년대에는 미국과의 수교를 반대하는 개화 정책 반대 운동으로 이어졌다. 1890년 이후에는 항일 의병 투쟁으로 계승되었다.
개항기 위정척사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성주 지역의 유생들은 상소나 통문을 통해서 열강의 침략 및 서양의 사상과 종교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내·외직을 두루 역임했던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 이진상의 아들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 등이 특히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위정척사 운동에 참여하였다.
[역사적 배경]
1873년 고종의 친정과 더불어 추진된 개화 정책은 개화파의 주도하에 일본과의 개항으로 귀결되었다. 이에 대원군 집권 하에서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거치면서 강화된 척화(斥和)의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면서 집단적인 상소 운동으로 이어졌다. 소위 척사소(斥邪疏)를 통해 위정척사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위정척사 운동은 이항로(李恒老), 기정진(奇正鎭), 유인석(柳麟錫), 최익현(崔益鉉) 등이 주도했고, 경상북도 성주에서는 응와 이원조, 한주 이진상, 한계 이승희와 한주학파 유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경과]
경상북도 성주 출신의 이원조는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위정척사 운동을 펼쳤다. 상소와 통문을 통해 삼정(三政)의 폐단(弊端) 및 시폐(時弊)에 대한 개혁과 함께 서학(西學)의 확산, 동학(東學)의 창도, 서양의 무력 침략에 대한 대응 방안을 건의하였다. 1866년 10월 프랑스의 침략에 즈음하여 조정에서 영남소모사로 이종상(李鍾祥)과 정윤우(鄭允愚)를 파견하여 영남 각 지역에서 소모사(召募使)를 차출하고 의려(義旅)를 규합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흥해에서 김천익(金千益), 청도에서 박시묵(朴時黙), 상주에서 유주목(柳疇睦)이 소모책으로 위촉되어 의려를 조직했고, 성주에서는 이원조가 소모책으로 위촉되어 의려를 조직하였다.
한주 이진상과 아들 한계 이승희는 성주 지역 유생들과 함께 1881년 영남 만인소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진상은 성주의 송천에서 모임을 가져 사학(邪學)을 배척하는 서신을 향리에 발송하고, 나아가 경상도 전역으로 통문을 발송하였다. 동생 이운상(李雲相)과 족제 이직상(李稷相)을 산양도회(山陽都會)에 참여하게 했고, 아들 이승희를 산양도회에 보내 척사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서신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이승희도 산양도회에 참가하여 「청척양사소(請斥洋邪疏)」를 제출하였다.
이승희는 1894년 동학 농민군의 봉기에 즈음하여 파견된 양호선무사 어윤중(魚允中)을 대신하여 조정과 보수 유림의 뜻을 반영한 통문 「통유동학문(通諭東學文)」을 쓰기도 하였다. 이승희는 통유문에서 동학의 교리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고 동학을 사교(邪敎)로 규정하였다. 또한 1894년 8월 23일 동학 농민군이 성주 지역에 들어와 접소를 세우고 활동하자, 성주목의 향리 출신 유학자 도한기(都漢基)와 함께 동학 농민군을 축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결과]
1895년의 을미의병 등 전기 의병의 전개 과정에서 이승희가 창의를 주장했으나 곽종석(郭鍾錫)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성주 지역의 위정척사 운동은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위정척사 운동은 외세 침략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유생들의 국권 수호 운동이다. 안으로는 내정 개혁, 밖으로는 서양 열강의 무력 침략과 서구 사상의 수용에 반대하는 내수외양책(內修外攘策)으로 개항기 구국운동의 하나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양반 유생층 중심으로 전개 이후 항일 의병 운동으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