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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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代 |
영어공식명칭 | Modern Time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1864년부터 1910년까지 경상북도 성주 지역의 역사.
[개설]
성주 지역에서는 개항기 반봉건 농민 항쟁으로 1862년(철종 13) 임술년(壬戌年) 농민 항쟁, 1883년(고종 20) 계미년(癸未年) 농민 항쟁,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운동 등이 일어났고, 외세의 침략에 대한 반제국주의 운동, 곧 위정척사 운동으로 전개된 1866년(고종 3) 병인 양요에 대응하는 의병 활동 및 1881년(고종 18) 영남 만인소 등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대한 제국기 국권 회복 운동으로 의병 전쟁, 외교 독립론의 전개, 애국 계몽 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반봉건 농민 항쟁]
조선 후기인 1832년(순조 32) 성주는 1만 1940가구, 5만 2082명의 인구와 답 1만 3009결, 전 7,303결의 토지를 보유한 경상도에서 네 번째로 큰 군현이었다. 당시 성주에서는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면서 부유해진 농민이 출현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몰락하여 고용살이로 연명하거나 유망하는 농민도 증가하면서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더구나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소농과 빈농이 지방관의 수탈과 권세가 및 부호의 탈세액까지 과중한 부세 부담을 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62년(철종 13) 농민 항쟁이 발생하였고, 개항 이후 1883년(고종 20)의 농민 항쟁을 거쳐,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운동으로 이어졌다. 1863년 성주 출신의 관료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는 성주읍의 폐단을 고치기 위하여 직접 청원에 나서기도 하였다.
[위정척사 운동과 영남 만인소]
성주 지역에서는 이원조와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와 한주학파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원조는 내·외직을 역임하면서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펼쳤다. 이원조는 상소와 통문을 통해 시폐(時弊)와 삼정의 폐단(弊端)을 지적하며 개혁을 주장하고 서학(西學)의 확산과 동학(東學)의 창도, 그리고 서양의 무력 침략에 대응할 방안을 건의하였다. 1866년(고종 3) 10월 프랑스의 침략에 즈음하여 조정에서는 영남 소모사로 이종상(李鍾祥)과 정윤우(鄭允愚)를 파견하여 영남 각 지역에서 소모사를 차출하고 의려(義旅)를 규합하고자 하였다. 1881년(고종 18) 이진상은 자신의 아들 이승희를 비롯한 성주 지역 유생들과 함께 영남 만인소 운동에 참여하였다. 나아가 이승희는 1894년 동학 농민군의 봉기에 즈음하여 파견된 양호 선무사 어윤중(魚允中)을 대신하여 조정과 보수 유림의 뜻을 반영한 통문 「통유동학문(通諭東學文)」을 쓰기도 하였다.
[국권 회복 운동]
개항기 국권 회복 운동이 전개되면서 성주에서도 의병 항쟁과 계몽 운동이 나타났다. 의병 항쟁은 1895년(고종 32) 경상북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성주에서는 이승희 등의 유생이 의병 봉기를 위한 창의를 시도하였으나 그만두었다. 그 대신 이승희 등은 만국 공법을 통해 일본의 침략을 견제하고자 한 외교 독립론을 펼쳤다. 1905년(고종 42) 을사늑약 이후 이승희 등 한주학파 유생들은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상소 투쟁을 전개하였고, 1907년에는 제2회 헤이그 평화 회의에 편지를 보내 국제적 여론에 호소하는 구국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뿐 아니라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을 비롯한 유생들은 일진회를 성토하는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한편 1907년 성주 유생들은 국채 보상 운동에 참여하여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이승희는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 회장을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5월 이승희가 연해주로 망명한 뒤 김창숙은 이승희를 대신하여 국채 보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대한협회 성주지회를 조직하고 총무를 맡기도 하였다. 김창숙 등은 1910년 국채 보상 운동이 실패하자 그동안 모금한 돈으로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