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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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寒岡學派 |
영어공식명칭 | Hangang School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정철 |
[정의]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정구와 그의 문인들에 의해 경상북도 성주에서 시작되어 낙동강 중하류에 걸쳐서 성립된 학단.
[개설]
한강학파(寒岡學派)는 정구(鄭逑)[1543~1620]의 학문적 성과를 토대로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의 가문적 배경과 학통상의 지위에 힘입었다. 정구는 가문적으로는 한훤당 김굉필(金宏弼)[1454~1504]의 외증손이며, 학통상으로는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고제(高弟)였다. 정구는 21세에 이황을, 24세에 조식을 스승으로 만나 이들의 학문을 폭넓게 수용했다. 또 김굉필의 『연보(年譜)』와 『사우문인록(師友文人錄)』을 편찬하였으며 임진왜란 뒤 도동서원(道東書院) 복설과 김굉필 등 ‘동방오현’의 문묘 종사에 온 힘을 쏟았다. 이런 연유로 사후 정구는 도동서원에 배향되기도 했다.
한강학파의 학문적 경향성은 정구의 학문적 성격에 의해 크게 영향받았다. 정구의 학문이 가진 성격을 요약하면 조식의 정신에 이황의 학문적 체계성이 더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요약은 자칫 정구의 학문이 단순히 이황과 조식의 학문을 절충했을 뿐이라는 오해를 부를 여지가 있다. 정구의 학문은 그 이상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장현광(張顯光)[1554~1637]은 정구의 학문을 ‘명체적용(明體適用)’의 학문으로 규정한 바 있다. ‘명체’의 학이 성리학을 말한다면, ‘적용’의 학은 정구가 성취한 예학(禮學)과 경세학(經世學)을 의미한다. 명체가 원리에 해당한다면 적용은 구체적 현실 적용의 학문을 뜻한다. ‘명체’의 학에 계승적 측면이 강하다면, ‘적용’의 학은 정구의 ‘한강학’이 일궈낸 독자적 영역이라 볼 수 있다.
이황과 조식이 사망한 이후 정구는 ‘영남 맹주 의식’을 가졌던 것이 분명하다. 정구는 고향 성주에서 시작해서 낙중(洛中), 즉 낙동강 중류 지역은 물론 낙하(洛下)와 낙상(洛上), 나아가 영남 전체와 심지어 경기 지역에까지 학파의 영역을 넓히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정구의 거주 및 강학 공간의 이동과 관련이 있다. 정구의 출생지는 성주의 사월리 유촌[현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이지만 30대 이후 여러 번 주거지를 옮겼다. 30대에는 창평산(蒼坪山)[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갖말 뒷산]의 한강정사(寒岡精舍), 40~50대에는 회연초당(會淵草堂)[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60대에는 수도산(修道山)의 무흘정사(武屹精舍)[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로 옮겨 가며 학문을 연마하고 강학하다가 마침내 70세 때인 1612년에는 대구 근처인 칠곡의 노곡정사(蘆谷精舍)[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금산리]로 옮겼다. 나중에 노곡정사가 화재를 당하자 다시 인근의 사양정사(泗陽精舍)[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로 옮겨 저술과 강학에 전념했다. 정구가 대구 근처로 옮겨 오게 된 배후에는 대구 지역 출신 제자 서사원(徐思遠)[1550~1615]과 손처눌(孫處訥)[1553~1634]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대구·칠곡 일대의 학자들이 대거 정구의 학단에 들어왔고 낙중 일대가 거의 정구의 학파에 포함되었다.
만년에 정구가 안동부사[1607년]를 지낸 것도 ‘영남 맹주 의식’과 무관하지 않으며, 낙상 지역에까지 학파의 영역을 넓히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정구는 낙하 지역으로 자신의 학단을 넓혀가는 데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낙하 지역 학단 경영의 대표적인 모습은 만년에 지병 치료차 동래 온정(溫井)에 다녀온 기록을 담은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 속에 잘 담겨져 있다. 정구의 나이 75세인 1617년 7월부터 9월까지 이루어졌다. 전후 45일에 걸친 욕행은 낙동강 연안을 중심으로 탄탄하게 구축되어 있었던 한강학파의 결속을 재확인하고, 새로운 문인들을 규합해 가는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을 만큼 연로의 영남 유림들이 회합한 일대 사건이었다.
『회연급문제현록(檜淵及門諸賢錄)』에 수록된 정구의 문인은 342명이다. 이 규모는 정구와 같은 세대이며 중앙에서 고위 관직을 역임했던 류성룡(柳成龍)이 117명, 김성일(金誠一)이 40명, 정인홍(鄭仁弘)이 115명이었던 것과 비교할 때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한강 문인은 전국적으로 분포하였지만 90%가 영남 출신이라는 점에서 지역성이 강했다. 주목할 것은 전체 문인의 약 60%가 성주, 칠곡, 대구, 현풍, 고령, 창녕, 영산, 함안, 밀양 등 낙동강 중류 지대에 분포했다는 점이다. 학파의 거점은 크게 나누면 성주 지역, 칠곡·대구 지역, 현풍·고령 지역, 창녕·영산·함안·밀양 지역으로 대별할 수 있으며, 회연서원(檜淵書院)[성주]·사양서원(泗陽書院)[칠곡]·연경서원(硏經書院)[대구]·도동서원(道東書院)[현풍]·관산서원(冠山書院)[창녕]·도림서원(道林書院)[함안] 등 정구의 제향처도 이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한다.
『회연급문제현록』에 등재된 성주 지역 문인은 67명으로 한강 문인 전체의 약 20%에 해당한다. 정구의 생활 및 강학의 기반이 성주·칠곡에 걸쳐 있었음을 고려할 때, 이 지역에서 다수의 문인이 배출된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고제 그룹으로 묶을 수 있는 『한강언행록(寒岡言行錄)』 집필자 그룹에도 성주 지역 출신이 8명이나 된다.
한강학파의 확대는 다른 학파와는 다소 다른 양상으로 이루어졌다. 이미 존재하고 있던 군소(群小) 문호(門戶)의 수용과 흡수를 통해 그 외연을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서사원의 낙재문파(樂齋門派)와 손처눌의 모당문파(慕堂門派)의 정구 문하 귀속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정구 문인 중에는 김우옹, 정인홍, 류성룡, 조호익, 장현광, 정경세의 문인과 겹치는 인물이 146명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정구의 학문이 갖는 포괄성과 절충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구 이후에 한강학파의 학통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한 갈래는 허목(許穆)[1595~1682]을 매개로 근기남인(近畿南人)으로 이어졌다. 숙종의 명령에 의해 작성된 『회연급문록』은 처음에 장현광을 수제자로 올렸다가, 숙종에 의해 거부당하고 허목을 수제자로 상정했다. 이후 근기남인들은 영남의 퇴계 학통과 구분하여 ‘이황-정구-허목-이익-안정복-황덕길(黃德吉)-허전(許傳)’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상정한다. 영남에서도 정구의 학문을 계승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회연서원을 중심으로 한강학파의 확산을 도모했다. 그들 중에는 정구와 장현광의 재세 시절 양 문하를 동시에 출입한 이들이 많았으므로, 정구가 사망한 후에는 가장 걸출한 유종(儒宗)이었던 장현광 문하로 흡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