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2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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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영어공식명칭 | Joseon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정철 |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성주 지역의 역사.
[개설]
성주는 고려 시대인 1308년(충선왕 즉위년)부터 1310년까지 잠시 성주목(星州牧)으로 불리기도 하였지만, 성주목이라 본격적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조선 전기인 1401년(태종 1) 이후이다. 조선 시대 거의 대부분 성주는 성주목으로 불렸다. 1895년(고종 32) 칙령 제101호로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성주군이라 고쳐 불렀다.
일찍부터 성주는 경상도 지역에서도 개간된 농토가 가장 많은 곳으로, 제방도 많이 설치된 만큼 물도 풍족하여 농업 생산량이 많은 풍요로운 곳이었다. 또한 대구에서 조령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성주 지역에 태종(太宗)과 단종(端宗), 세조(世祖)의 태실을 만들고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까지 건립하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가 재난의 시기에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성주는 16세기 들어 경상도 주요 군현들 중에서 1위인 상주에 이어 2위까지 성장하며 경상도 5대 도시[경주, 상주, 진주, 안동, 성주] 중 하나가 되었다.
[영남 학인의 중심지 성주]
조선 건국 당시부터 영남의 주요한 도시였던 성주는 16세기 중반 들어 사림 세력이 성장한 중요한 거점들 중 하나이기도 하였다. 이미 임진왜란 이전인 1558년(명종 13) 성주 최초의 서원인 천곡서원(川谷書院)이 세워지는 등 영남 학인들의 중요한 근거지였으며, 조선 후기에도 많은 서원이 설립되어 수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황(李滉), 조식(曺植) 모두의 고제(高弟)인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김우옹(金宇顒),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등이었다.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1751]에서 성주를 “산천이 밝고 수려해 일찍이 문명(文名)이 뛰어난 사람들과 이름 높은 선비가 많았다. 논은 영남에서 가장 기름져서 씨를 조금만 뿌려도 수확이 많다.”라고 평가하였다.
[임진왜란과 성주성 전투]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성주진 관내에서도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다. 성주목사였던 제말(諸沫)과 고령의 김면(金沔), 박정완, 합천의 정인홍(鄭仁弘), 초계의 이대기 등이 의병을 일으켰고, 성주성 전투에서 세 차례 격전 끝에 성주성을 탈환하였다. 임진왜란 중에는 경상도 감영이 잠시 성주목 팔거현[현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었으며, 당시 성주진을 지키기 위하여 거창에 모인 2,000여 명의 군사를 나누어 우현과 마령 등을 각각 지켜 냈다.
임진왜란 전투에서 성주진 지역의 중요성은 김면의 「격강좌렬읍문(檄江左列邑文)」[강좌(江左) 여러 고을에 보낸 격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격문에는 “생각하건대 성주 고을은 적의 침입로의 요충 지대로서 참으로 성도의 검각(劍閣)과 같으니 한 도의 웅부(雄府)로서 어찌 형주와 다르랴? 곡식은 수년을 지탱할 수 있으니 오창의 군량과 같고 무기는 다른 고을에 비해 갑절이 되니 한나라의 굳센 노(弩)보다 많다. 사방의 백성들은 모두 도망쳤으나 초나라의 3호뿐이 아니고 백성이 함몰되었으니, 아직 즉묵(卽墨)의 만가가 있다. 성주를 지키면 국가의 회복을 꾀할 수 있으나 이곳을 잃으면 국가의 대사를 그르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