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2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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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집필자 | 김세기 |
[정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상북도 성주 지역의 역사.
[선사 시대]
성주 지역 청동기 시대는 고인돌군의 형태로 미루어 여섯 개의 생활권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기원전 1세기 고조선 혹은 낙랑 지역 유이민 파동에 따라 한(漢)의 발달된 철기 문화가 급속히 전파되었고, 철제 무기 및 농기구 제작 기술의 발달로 정치체들 간 정복과 통합이 활발히 일어났다. 철기 문화와 함께 무늬 없는 토기[무문 토기(無文土器)]가 주류를 이루던 토기 제작 기술에도 한의 발달된 회도 문화(灰陶文化)의 영향을 받아 와질 토기(瓦質土器)라는 새로운 토기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문화상을 잘 보여 주는 것이 경상남도 창원시 동면 다호리에서 발견된 창원 다호리 유적이다. 성주읍 예산리 유적도 창원 다호리 유적과 유사한 출토 양상을 보인다. 즉 철기 제품과 와질 토기 주머니호가 일괄 출토되어 1세기쯤 성주 지역의 사회 변화 추이를 알 수 있게 한다.
성주 지역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유이민 파동으로 철기 문화가 보급되고 확산됨에 따라 내부 세력 사이의 우열이 심화되었다. 청동기 시대에 가장 유력한 세력으로 존재하였던 백천(白川) 하류의 선남면 세력은 이 시기 이천(伊川) 하류의 성주읍 세력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 새로운 문화로 등장하는 와질 토기와 철기 문화가 성주읍 예산리에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성주읍 예산리 출토의 와질 토기는 주머니호와 조합 우각형 파수부호(牛角形把手附壺)[쇠뿔 손잡이 단지] 등 와질 토기 전기 단계의 빠른 토기들이고 주조 철부 또한 부분적으로 단조된 것으로 제철 기술이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와질 토기가 발견된 성주읍 예산리는 성주읍 중심부에 토성(土城)처럼 돋을 막 하게 뻗어 있는 언덕의 동북쪽 부분으로 야트막한 뒷산과 연결되어 있는 약간 경사진 구릉이다. 이 예산리 와질 토기 및 철기 유물은 성주읍 지역이 성주 지역의 여섯 개 세력 중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즉 성주읍 세력이 새로운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진한(辰韓)·변한(弁韓)의 한 소국(小國)으로 성립하여 고대 시대로 변화한 것이다. 성주읍 예산리 와질 토기 집단은 소국을 건국한 뒤 점차 같은 수계(水系)의 고인돌 세력과 통합과 복속을 통하여 국읍(國邑)과 읍락(邑落)의 관계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말하는 성산가야(星山伽耶) 혹은 벽진가야(碧珍伽耶)이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 시대 고분의 규모와 범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성주 지역에는 산성을 배경으로 능선의 정상부에 직경 20~30m의 고총(高塚)이 10기 이상 줄지어 분포하는 고분군이 성주읍 성산리 고분군을 비롯하여 월항면 수죽리 고분군, 용각리 고분군과 금수면 명천리 고분군 등 세 곳에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들은 모두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집단이 하나의 세력권을 형성하던 지역이며 결국 여섯 개의 고인돌 집단이 세 개의 대형 고분 집단으로 통합되었음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세력들의 통합 양상을 살펴보면, 성산리 고분군이 중심이 된 성주읍 집단은 와질 토기와 철기 유물에서 보듯이 이미 1세기쯤부터 우세한 지배력을 확보하기 시작하여 국읍으로 성장하여 나갔다. 그러면서 같은 수계인 이천 상류의 벽진면 해평리, 매수리 세력을 통합하고 나아가 백천 하류, 낙동강 유역의 선남면 세력까지도 흡수하여 성산가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성산가야는 북서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하여 일찍이 4세기 대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삼국 시대]
삼국 시대의 기록물에서 성주와 관련한 기록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일리촌이라는 지역명이 보이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5 「열전(列傳)」의 ‘박제상전’에 등장하는 일리촌이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으로 추정된다. 일리촌간(一利村干) 구리내(仇里迺)는 일리촌의 지방 유력자였다. 신라 눌지왕은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 있는 자신의 동생 복호를 구출하기 위하여 지역의 유력인을 모아 회의를 하였다.
일리촌간 구리내는 이 회의에 소집되어 눌지왕의 자문에 응하였다. 이때 소집된 촌의 유력인은 수주촌간(水酒村干) 벌보말(伐寶靺)과 일리촌간 구리내, 이이촌간(利伊村干) 파로(波老)였다. 이들은 복호를 구출하는 일에 자신들이 직접 나서는 대신 삽량주간 박제상을 추천하였다. 일리촌은 오늘날의 고령군 성산면으로 추정하지만, 그 범위가 고령군 성산면으로만 한정되지 않고 성주 지역까지 포함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성산이라는 지명이 고령군 외에 성주군에도 있기 때문이다. 성주의 진산이 성산이고, 성주읍에 성산동이라는 행정 지명이 있는 것이 이를 잘 보여 준다. 5세기 초 눌지왕과 관련한 일리촌간 구리내의 일화는 당시 성주 지역이 친신라적 성향을 띠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통일 신라 시대]
신라는 삼국 통일 후인 685년(신문왕 5) 넓어진 국토를 구주 오소경(九州五小京)으로 정비하였다. 이때 낙동강 서쪽에 자리한 성주는 청주(菁州)의 관할이 되었다. 8세기 중엽 경덕왕(景德王)은 모든 제도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바꾸는 한화 정책(漢化政策)을 실시하였다. 757년(경덕왕 16) 12월 전국 주·군·현의 명칭을 한식으로 개명한 데 이어, 759년 정월에는 관호까지 중국식으로 바꾸는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청주는 강주(康州)로 바뀌고 청주 관내의 군현의 이름도 한식으로 변경되었다. 강주에는 고령군[오늘날의 경상북도 고령군]과 성산군[오늘날의 성주군]이 예속되었다. 성주군은 당시 성산군이라고 불렀다.
성산군과 관련한 『삼국사기』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성산군(星山郡)은 본래 일리군(一利郡)[이산군(里山郡)]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가리현(加利縣)이다. 거느리는 현령은 넷이다. 수동현(壽同縣)은 본래 사동화현(斯同火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상세치 않다. 계자현(谿子縣)은 본래 대목현(大木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약목현(若木縣)이다. 신안현(新安縣)은 본래 본피현(本彼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경산부(京山府)이다. 도산현(都山縣)은 본래 적산현(狄山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상세치 않다.”
성산군의 영현 가운데 수동현[사동화현]은 오늘날의 경상북도 구미시 인의동, 계자현[대목현]은 오늘날의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이다. 성주군의 군치는 성주읍 성산동, 신안현은 성주읍, 도산현은 성주군 금수면으로 추정한다. 성주와 관련한 역사적 사건으로 헌덕왕 14년인 822년에 일어난 김헌창(金憲昌)의 난이 있다. 김헌창은 거듭된 자연재해로 이반한 지역 민심에 편승하여 반역을 일으켰다.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명분으로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였다. 이때 김헌창은 웅천주의 주치인 웅진 공산성에서 장안국왕을 자칭하였다. 나아가 김헌창은 자신이 관할하던 웅천주 외에 무진주, 청주, 완산주, 사벌주의 네 도독과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포섭하여 자기 소속으로 삼고자 하였다. 구주 중 오주, 오소경 중 삼소경을 망라한 신라 최대의 반란이었다. 이때 성주 지역은 김헌창의 반란군이 일시 점거한 곳 중의 하나였으나 김균정(金均貞)이 이끄는 관군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후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
신라 후기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지방에서는 호족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였다. 후삼국 시대 성주 지역은 고려와 후백제의 쟁패지가 되었다. 후삼국 시대 성주 지역을 대표하는 호족은 양문(良文)과 이총언(李悤言), 이능일(李能一), 배신예(裵申乂), 배최언(裵崔彦) 등이었다. 후삼국 정립기 성주 지역에서 활동한 호족들의 활동은 벽진 지역과 성산 지역으로 활동 양상이 뚜렷하게 구별된다. 벽진의 경우 양문에서 색상(索湘)을 거쳐 이총언에 이르는 지배층의 변화가 나타났고, 성산의 경우 이능일과 배신예, 배최언 등이 같은 시기에 활동하였다. 그리고 당시 성주를 대표하는 이총언과 양문이 고려를 세운 왕건의 편에 섬으로써 왕건이 최종 승자가 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공을 인정하여 왕건은 이총언 사후인 940년(태조 23) 벽진군(碧珍郡)을 경산부(京山府)로 승격하여 지역의 격을 높여 주었다.
고려는 건국한 지 80여 년이 지난 995년(성종 14) 지방 제도를 개편하고 외관을 파견하였다. 성주는 신라 시대에는 본피현(本彼縣)이었으나, 경덕왕(景德王) 때 신안현(新安縣)으로 고치고 성산군(星山郡)에 소속시켰는데, 후에 벽진군으로 고쳤다. 태조가 경산부로 고쳤고, 경종(景宗) 때 광평군(廣平郡)으로 강등하였고, 성종(成宗) 때 대주도단련사(岱州都團練使)로 하였다가 현종(顯宗) 때 다시 경산부로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때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로 올렸다가 후에 지금의 이름인 성주로 목을 삼았다. 즉 성주목(星州牧)이 된 것이다. 그리고 충선왕(忠宣王) 때 다시 환원하여 경산부로 고쳤다.
[조선 시대]
성주는 1413년(태종 13) 목(牧)으로 승격한 이후 몇 차례 승강을 거듭하였다. 조선 시대 성주 지역에는 팔거현(八莒縣), 화원현(花園縣), 가리현(加利縣) 등 3개의 속현이 존재하였다. 1018년(현종 9)에 예속된 후 성주의 속현으로 존속하던 팔거현과 화원현은 17세기 성주에서 독립하고, 가리현만 속현으로 남아 있었다. 팔거현은 1640년(인조 18) 칠곡도호부가 설치되면서 분리되었다. 이 지역은 일시적이지만 경상도 감영이 설치되거나 성주에 설치되었던 진(鎭)을 옮겨 오는 등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조정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1640년 팔거현의 가산에 산성을 축조하였다. 하지만 가산산성을 쌓고 보니 산성과 읍치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 여러 가지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이에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통치를 위해 팔거현을 성주에서 독립시키고 칠곡도호부를 설치하여 관할하게 하였다. 팔거현의 독립은 조선 시대 성주 지역의 행정 편제상, 그리고 지역상 가장 큰 변화였다.
화원현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성주와 대구로의 이래(移來)를 거듭하던 곳이다. 1601년(선조 34) 경상 감영이 대구에 설치됨에 따라 감영의 경비 조달을 위하여 대구에 이속되었으나 곧 성주로 환원되었다. 1684년(숙종 10) 다시 대구부에 이속되었다. 다른 속현들과 달리 가리현은 조선 시대 전 기간 성주의 속현으로 존속하였다. 가리현이 독립하지 못한 채 성주의 속현으로 존속한 원인은 자료의 소략으로 명확하게 밝히기 어려우나, 정부-성주목[주읍]-가리현[속현]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즉 조선의 지방 통치 체제와 수취 체제의 미비로 인하여 속현의 존속을 묵인한 중앙 정부의 입장, 팔거현과 화원현의 독립으로 약화된 읍세 및 물산의 확보 및 유통 등을 이유로 가리현을 속현으로 존속시키고자 하는 성주목의 입장, 주읍 재지 세력과의 관계 및 소읍에 불리한 수취 체제 등을 이유로 성주의 속현으로 존속하길 원했던 가리현의 입장 등 각각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속현으로 존속하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성주진 관내에서는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다. 고령의 김면(金沔), 박정완(朴廷琬), 합천의 정인홍(鄭仁弘), 초계의 이대기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임진왜란 전투에서 성주진 지역의 중요성은 김면의 「격강좌렬읍문(檄江左列邑文)」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격문에는 “생각하건대 성주 고을은 적의 침입로의 요충 지대로서 참으로 성도의 검각(劍閣)과 같으니 한 도의 웅부(雄府)로서 어찌 형주와 다르랴? 곡식은 수년을 지탱할 수 있으니 오창의 군량과 같고 무기는 다른 고을에 비해 갑절이 되니 한나라의 굳센 노(弩)보다 많다. 사방의 백성들은 모두 도망쳤으나 초나라의 3호뿐이 아니고 백성이 함몰되었으니, 아직 즉묵(卽墨)의 만가가 있다. 성주를 지키면 국가의 회복을 꾀할 수 있으나 이곳을 잃으면 국가의 대사를 그르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경상도 감영은 당시 성주진을 지키기 위하여 거창에 모인 의병들과 2,000여 명의 군사를 나누어 우현과 마령 등을 지켜 냈다.
[근현대]
성주는 조선 후기 미곡과 면화 재배가 활발하였다. 또한 유통 경제가 발달할 수 있는 조건도 갖춰 수운과 쉽게 연결되었으며 육로는 위로는 상주와 김천을, 아래로는 고령과 합천을 연결하였다. 상업 도시로 발전하는 대구와도 인접하여 읍시를 중심으로 하나의 통일된 장시망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성주는 18세기 후반 상업적 농업이 활발하였으며, 농민층의 분화도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농민층의 분화로 봉건적 지배 수탈에 대한 농민층의 저항도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지주 전호제의 경제 외적 강제는 약화되었고, 부세 제도도 동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주 지역의 사족 지배 체제는 급속히 약화하였다.
19세기 조선은 안으로는 봉건제의 모순,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 성주 지역의 유림은 갑오 농민 전쟁과 청일 전쟁을 거치면서 화이관을 중심으로 한 현실 인식에 일정한 변화를 갖게 되었다. 특히 제국주의의 침략을 단순히 유교적인 차원에서 파악한 것이 아니라 만국 공법이라는 국제적인 관계로 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당시 유림의 의병 항쟁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국제 사회에 호소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개화파의 문화 계몽 운동에 참여하거나 만주에 망명하여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한 독립운동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사람들이 곽종석, 이승희(李承熙), 김창숙(金昌淑), 장석영(張錫英) 등이었다.
1907년(순종 1) 성주 지역 유생들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국채 보상 운동에 동참하였다. 곽종석은 전원(田園)을 팔아서 그 돈을 서울로 보냈고, 이승희는 자제들이 회갑 잔치를 위하여 모은 돈을 내놓았다. 3월 20일 성주군 국채 보상 의무회가 개최되자 수천 명이 의연금을 헌납하였다. 한편 문화 계몽 운동도 전개하였다. 특히 김창숙은 청천서원에 성명학교를 설립하여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는데, 이승희는 1908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밀산부에서 이상설과 같이 한흥동을 개척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비록 자금 부족으로 한흥동을 건설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이승희가 지닌 선구자적 면은 높이 평가된다.
1919년 3.1 운동이 전개되자 성주에서는 선남면 선원동에 사는 이현기(李玄琪)를 중심으로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현기는 20~30명의 군중을 규합하여 3월 27일 오후 2시쯤 선남면 소학동 노상에서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날 가천면 동원동의 이상해(李相海)도 행상 신성백에게서 전국의 독립 만세 운동을 전해 듣고, 3월 27일 만세 시위 운동에 참여하였다. 성주에서의 독립 만세 시위는 4월 2일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성주의 만세 시위는 유림과 기독교 측이 연합하여 전개하였는데, 이는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광복 이후 대구에서 10월 항쟁이 벌어지자, 대구와 인접한 성주 지역에서도 항쟁이 매우 격렬하게 일어났다. 10월 3일 대구에서 온 선동인 50명과 성주 지역의 좌익 세력 300여 명이 앞장선 시위에 수천 명의 군중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친일 경찰과 관료를 앞세워 식량 공출을 하는 미군정에 분노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경찰은 시위 가담자들을 체포, 구타, 고문, 살해 등으로 보복하였다. 이 탄압을 피해 광복 이후 건국 운동을 주도한 세력들은 피신하거나 월북하였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 성주 지역은 새마을 운동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1975년 새마을 운동은 도시 새마을 운동의 실시와 함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공업 중심의 근대화 과정에서 농업을 주된 산업으로 했던 성주 지역에서는 이농 현상이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성주와 대구 사이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인구 감소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현재 성주는 대체 작물 개발과 보급으로 군민들의 부가 가치를 높이고, 다양한 문화 자원을 이용하여 새로운 성주를 모색해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