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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134
한자 舞鶴里
영어공식명칭 Muhak-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무학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규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3월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무학동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88년 5월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무학동에서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무학리로 개편
성격 법정리
면적 16.31㎢
가구수 136가구
인구[남/여] 188명[남 98명/여 90명]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무학(舞鶴)’의 지명 유래와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는 없다. 배바우[선암(船巖)]는 과거 대가천을 따라 올라온 배를 정박해 두었던 바위가 배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고려 시대부터 금물법(今勿法)[혹은 금물방]에 속하였다. 1845년(헌종 11) 성주목사 김횡(金鑅)[1784~1847]이 금물법을 금수방(金水坊)으로 개칭하였다. 1895년(고종 32) 5월 관제 개혁 때 현재의 군 명칭인 성주군(星州郡)으로 확정하고 방(坊)을 면(面)으로 개편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무학동으로 하고 금수면의 법정동으로 편제하였다. 1988년 5월 조례 제1076호에 따라 동(洞)을 리(里)로 개정하여 금수면 무학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무학리는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대가천(大伽川)과 그 지류들이 산지 사이를 관통하고, 이들을 기반으로 농지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대표적인 산은 염속산(厭俗山)[872.5m]으로 동쪽으로 후평리 노산(露山)과 살티재[乷峴], 염속봉산(厭俗峰山)[679.3m]으로 이어져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과 군계(郡界)를 이룬다. 무학1리에는 독용산(禿用山)[956,1m] 북편에서 발원하여 넉바우 마을 중앙을 흘러 마을 앞에서 대가천과 만나 성주 저수지[성주호]로 들어가는 소하천인 광암천(廣巖川)이 흐른다.

[현황]

무학리금수면의 서쪽에 자리하여 동부와 남부는 금수면봉두리성주군 가천면, 서부와 북부는 금수면 영천리와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조마면과 접한다. 2021년 12월 31일 기준 면적은 16.31㎢이며, 무학1리와 무학2리 2개 행정리에 136가구, 188명[남 98명, 여 9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무학리의 인구는 1974년 903명에서 2018년 175명으로 감소하다가 2021년 188명으로 다소 늘어났다. 가구 수는 1974년 159가구에서 1994년 100가구로 감소한 후 계속해서 증가하여 2018년 116가구, 2021년 136가구로 나타났다.

무학리 동쪽 아래쪽에 성주 저수지[성주호]가 있으며, 호수로 유입되는 대가천의 지류를 따라 넉바우[광암(廣巖)], 챙기[진계(眞溪)], 안챙기[내진계(內眞溪)], 먹방[묵방(墨坊)]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넉바우 건너편 성주 저수지[성주호] 끝 산자락에 있던 빈지봉[일명 빈주봉]은 성주호 건설로 대부분 수몰되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넉바우는 조선 전기 석릉군(石陵君) 전룡(全龍)의 세거지였고, 이후 그 후손들의 집성촌이 되었다. 챙기는 고종(高宗) 때 순흥 안씨(順興安氏) 안중혁(安重赫)이 입향한 곳이다.

무학리는 성주군 지역에서 처음으로 천주교(天主敎)가 들어온 지역이다. 천주교도들은 1866년(고종 3) 병인년(丙寅年) 박해 이후 김천시 증산면 황점과 서무터를 거쳐 이곳으로 유입되었다가 1890년(고종 27) 성주읍 성산리 산막터에 공소(公所)가 설치되자 그곳으로 옮겨 갔다.

문화 유적으로 선덕비군(善德碑群)이 있다. 성주 저수지[성주호]가 건설되기 전 금수면봉두리에서 후평리 신성으로 통하는 도로변에 있었던 비석들로 성주호 건설이 시작되면서 1996년 봉두리의 백운정(白雲亭)과 무학리 넉바우 마을 사이 국도변에 마련한 소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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