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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물들은 거의 다 6·25전쟁이 끝나고 난 뒤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다. 강경읍 에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건물은 바로 서창리 의 한일은행 , 중앙리 의 연수당 약방 , 북옥리 의 감리교회 건물 등이 남아있을 뿐이다. 한편 중앙리 83번지 에 100년이 넘은 개인 주택이 있다. 이 주택은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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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920년대를 전후해서 세워졌다. 현재 강경 에 남아 있는 근대건축물로는 한일은행 강경지점 , 북옥리 감리교회 , 중앙초등학교 강당 , 강경노동조합 건물 ,...로 개편되면서 조선식산은행 강경지점 으로도 사용되었다. 또한 해방 과 더불어 한일은행 강경지점 으로, 동일은행 강경지점 , 조흥은행 강경지점 , 다시 충청은행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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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에 앞서 먼 곳에서부터 행림서원 이라는 이름을 상징하는 몇 아름이 훌쩍 넘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때 수많은 유생이 드나들었을 서원은 현대 사회로... 맞이한다. 제향일이 되면 서원 마당은 논산 지역의 유림들로 성황을 이룬다. 평소 은행나무만이 지키고 서 있는 행림서원 은 고고하다 못해 고요한 기운을 풍기지만 제향일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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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기 공급을 위한 화력발전소가 대흥리 에 1백 평 규모로 세워졌다. 또한 상하수도도 놓아졌고, 이때 호남 지방 최초로 강경극장 도 세워졌다. 그 밖에 중요 관공서와 은행 등도 설립되었다. 이와 같이 경제상 중요한 위치에 있고 인구도 증가하여 강경 은 연간 1천만 원의 수출입액을 올리게 되었다. 더욱이 강경 인사들이 강경 은 상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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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 도시와 군산 과 같은 새로운 하항(河港)도시가 발달하여 강경 은 점차 위축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1914년 논산 에 1921년 대전 에 각각 기존의 행정권과 은행권을 빼앗겨 강경 의 위상과 상권은 더욱 위축되었다. 결국 강경포구 는 소금, 미곡, 수산물 등의 물자유통에 있어 금강 을 이용한 수운 교통으로 군산 - 강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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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 있으며 만죽헌 서익 과 도애 이소(李韶, 1564~1646) 를 배향하고 있다. ‘행림'이란 이름은 서원 앞에 서익 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 두 그루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행림서원 을 건립하자마자 1년 뒤인 1868년부터 1870년까지 당시 조정의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 은 서원의 폐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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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해져 우편함이나 대문 밑에 넣어두면 끝이 난다. 우편물의 양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어 배달도 어렵지 않게 되었다. 또 가야곡우체국 에서 우편물을 배달하는 일보다는 은행과 같은 금융 상품들이 만들어 지면서 금융업에 대한 비중이 높아졌다. 마을 사람들도 편지나 소포를 부치는 일보다는 돈을 관리하는 데 우체국을 많이 이용하게 되었다. 그는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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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영을 그만두거나 또는 사망하여 현재는 3집만 남아 있다. 한편 현재 박청수 사장의 주택이 위치하고 있는 옥녀봉 일대는 일제강점기까지 명당이라 하여 변호사의 주택이나 은행 직원의 관사, 그리고 부잣집이 주로 위치하였다. 당시 강경읍 내에서 크고 잘 지어진 주택들이 바로 이 옥녀봉 일대에 주로 자리하였다. 이렇게 옥녀봉 일대에는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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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씨앗, 농자재 일체를 팔고 있는 상회이다. 삼화상회 의 주인인 문복규 씨는 80년이나 연산리 에서 살아온 터줏대감으로 유명하다. 삼화상회 옆집은 대추, 밤, 은행 등 각종 약재를 팔고 있는 대광상회 이며, 각종 의류, 이불, 매트를 취급하여 팔고 있는 상월상회 가 이어져 있다. 상월상회 의 옆으로는 잔치국수와 칼국수를 전문적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