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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333
한자 壬辰倭亂
영어공식명칭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이칭/별칭 임진 전쟁,동아시아 삼국 전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선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6월 17일 - 임진왜란, 일본군이 무주로 침입
전개 시기/일시 1592년 6월 23일 - 임진왜란, 무주 의병이 밤수골에서 일본군 격퇴
종결 시기/일시 1592년 7월 1일 - 임진왜란, 무주를 재차 침범한 일본군에 의해 무주 함락
성격 전쟁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조선을 침략한 일본에 의해 무주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역사적 배경]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은 경상도 동래부의 부산진 공격을 시작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그 후 7년 동안 조선은 일본과 전쟁을 하였으며, 명나라가 참전하면서 동아시아 삼국이 참전하는 전쟁으로 이어졌는데, 이 전쟁을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임진왜란'이라고 부른다. 부산진에 상륙한 일본군은 속전속결의 전략으로 5월 3일에 한성을 함락시켰다. 한성이 함락되었지만 조선의 국왕은 이미 의주로 피난하였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면서 전쟁은 장기전으로 전환되어 일본에게 불리해졌다. 이에 일본은 군수 물자 조달 등을 위해 전라도 지역에 대한 침략을 시작하였고, 일본군의 공격 목표에서 벗어나 있던 전라도 각지에 대한 침략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경과]

전라도 공격을 담당한 왜장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와 그의 휘하에 있던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였다. 당시 왜군 6부대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군대는 1592년 6월 23일 충청도 금산을 점령하고 진지를 구축하였다. 고바야카와의 부장 안코쿠지는 1만 군사를 이끌고 웅치를 거쳐 전주성으로 진격하려 하였고, 이에 전라도의 모든 관군과 의병 1,000명이 모여 웅치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라도로 진격하기 위해 준비하던 일본군은 별군(別軍)을 편성해 안코쿠지에게 지휘를 맡겼다. 그는 창원에서 남원을 거쳐 전주를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중간 지점인 의령에서 곽재우(郭再祐) 의병 부대의 저지를 뚫지 못하고 방향을 틀어 성주로 올라왔다.

고바야카와는 한성에 있다가 안코쿠지의 진로에 차질이 생겼다는 보고를 받고 병력을 이끌고 경상도 선산과 황간 지역을 통해 무주와 금산 지역을 공격하였는데, 6월 17일에 일본군은 지례를 거쳐 부항령(釜項嶺)을 넘어 무주로 침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지방 출신 장의현(張義賢) 등이 의병을 조직하여 항거하며, 6월 23일에 진격로를 탐색하러 나온 척후병들을 밤수골[栗峴]에서 물리쳤다. 그러자 일본군은 옥천을 경유하여 금산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용담을 거쳐 무주를 재차 침범하였고, 7월 1일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무주는 일본군에 함락되었지만, 일본군에 항거하여 무주를 지키고, 탈환하기 위해 관군과 의병이 앞장섰다. 특히 일본군의 잔인한 만행을 보고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의 활약은 주목할 만하다. 무주 출신의 의병으로 장의현장지현(張知賢) 형제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장의현장필무(張弼武)의 큰 아들로,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적이 침입하니 조정에서 화열 장군(火烈將軍) 겸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지례와 무주의 경계 지역에 있는 부항령을 지키게 하였다. 장의현은 병사를 이끌고 진군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순절하였다. 그의 동생 장지현도 창의하여 황간의 추풍령에서 일본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오희문(吳希文)이 지은 『쇄미록(瑣尾録)』에는 임진왜란 당시 무주와 그 인근 고을의 전투 상황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오희문은 해주 오씨로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처남인 이빈(李贇)이 전라도의 장수 현감으로 부임하자 장수에서 멀지 않은 황간의 외가를 방문하고, 또 자신 소유의 전라도 노비들에게 신공(身貢)도 걷기 위해 장수현에 들렀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울로 가지 못하고 장수에 머물면서 ‘피난 일기’를 썼다. 그가 기록한 일기인 『쇄미록』에는 관군 및 의병과 일본의 전투 상황 등이 매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결과]

임진왜란 이후 무주 지역 방어를 위해 적상산성이 수축되고 적상산에 사고가 건립되면서 무주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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