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T06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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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家族-成長期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
집필자 | 심재석 |
출생과 작명 : 이름 덕분에 유명해졌다
출생 당시 태몽이나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는 별로 없다. 이름은 선친이 지어주셨다. 보통 이름에 하늘천(天) 자를 잘 쓰지 않고 보통 일천 천(千) 자를 쓰는데, 선친이 이름을 지을 때 하늘 천 자로 써주었다. 선친께서 나의 이름을 높게 지어 주었고 이름 덕분인지 살아오면서 해온 일들이 잘되고 덕분에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주변에서 다 내 이름이 좋다고 이야기 한다.
보천교 교인이었던 아버지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해보면, 선친은 너무나 마음씨도 좋으신 분이었는데, 김군천이 태어난 뒤로는 전혀 가정을 돌보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보천교를 믿으셨는데 보천교는 1911년 차경석이 증산도와 동학의 교리를 중심으로 인의(仁義)의 실천을 기본 교리로 창설한 민족종교로 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십일전은 경복궁 근정전보다 두 배나 크고 웅대하여 당시의 보천교 교세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일부에서는 일제시대 물산장려운동의 주체가 보천교이며 항일운동의 자금원이었다고도 한다.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교인으로서 항일투쟁을 하시다가 고생하시고 고문을 당하셔서 눈이 멀어버렸다. 이후로 가정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못할 정도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김군천은 11살부터 12살까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학교는 김녕에 소학교가 있어서 소학교에 입학을 했다. 김녕초등학교 교장이 일본 사람이었다. 당시 김녕에는 초등학교장, 우체국장, 지서주임이 모두 일본 사람이었다.
첫 직장은 김녕 어업조합 출장소
김녕에 어업조합 출장소가 있었다. 제주시 서부두에 본부가 있었고, 출장소가 김녕, 성산포, 서귀포, 한림, 모슬포 5군데 있었다. 출장소 소장 부인과 어머니가 친분이 있었다. 아들이 서울에서 사범학교 다니다가 방학이라 내려왔다고 소개를 했더니 소장님이 날 만나자고 했다. 소장님은 학교 선생보다 어업조합 서기가 월급도 많고 고향에 출장소가 있으니 어업조합에서 일할 것을 권했다. 그래서 어업조합 시험에 응시를 하고 합격을 해서 직장을 갖게 되었다. 어업조합에서 8년간 근무를 했다. 지금 어촌계 건물이 있는 곳에 어업조합이 있었다. 처음 근무지는 성산포였고, 본부에 근무하다가 함덕에 잠시 근무하고 이후 김녕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난방을 위해 말똥을 주웠던 어린 시절
학교에도 일본 선생님이 있었는데 어느 날 집으로 찾아왔다. 동생이랑 같이 있었는데, 둘 다 진학 연령이 초과되었으니 올해는 꼭 학교에 들어와야 한다고 했다. 형제가 함께 소학교에 진학을 해야 한다고 했다. 진학을 할 때는 시험을 보았다. 당시의 모든 교과서는 일본어로 되어 있었다. 교과서를 읽어보라고 하는데 일본어로 된 것을 다 읽고, 숫자도 일본어로 16까지 세니까 합격을 시켜주었다.
동생은 1학년, 나는 2학년에 입학했다. 5학년 때 가정 형편상 도저히 학업을 지속할 수 없었다. 당시 제주에서는 난방을 위해 말똥으로 불을 땠는데, 산에 말을 방목했으므로 산에 가면 말똥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마니를 들고 산에 가서 말똥을 주워서 팔았다. 주로 일본 사람들을 상대로 팔았다. 내가 어렵게 사는 것을 아는 마을 사람들이 동정삼아 내가 주워온 것을 사주기도 했다. 당시 1가마니에 5전씩 받았다.
김녕 앞바다에서는 멸치가 많이 잡혔다. 일본 사람들이 와서 노변에 철판으로 길이 3미터, 넓이 1미터 정도 되는 물탱크를 만들어서 잡아온 멸치를 삶고 간을 맞춰서 일본에 보냈다. 거기서 일을 하면서 학비를 충당했다. 담임선생님에게 5학년 때 그래도 학비가 부족해서 동생이랑 같이 학교 다닐 수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