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T06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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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寧里-歷史-傳說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
집필자 | 심재석 |
김녕초등학교 역사관 : 마을 역사가 담긴 곳
10여 년 전에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집에 보관되어 있는 오래된 물건들(해녀 잠수옷, 해녀 물질할 때 필요한 도구 등의 자료)이 있으면 가지고 오라고 해서 역사관이 시작되었다. 초창기에는 이러한 물건을 학교 측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역사관이 만들어지고 나서 제대로 전시해 놓았다고 한다. 현 교장 선생님이신 김경식 선생님의 노력으로 이 역사관은 빛을 발하게 되었다.
역사관을 방문한 동문들이 잘 만들어진 역사관을 보면서 학교에 돈을 기부하고 가는 사례들이 많아지면서 역사관은 제대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초등학교는 지역 출신 학생들이 대부분이어서 역사관에 오면 벽에 걸려 있는 이름, 사진을 보면서 “우리 할아버지다, 아빠다”하며 역사관에서 또 다른 가족의 역사를 찾기도 한다. 제주시에서 보조금(벽의 보수 작업)이 나오지만 넉넉한 예산을 지원받지 못하는 형편이어서 운영을 위한 재원의 대부분은 동문의 후원, 마을 사람들의 후원에 의존하고 있다.
역사관에 진열된 사진과 자료는 주로 동문회에서 제공한 것이다. 처음 학교가 세워진 때부터 2006년까지의 자료가 있다. 사진이 없는 동문에게도 이름만이라도 남겨 그들의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현 교장 선생님(김경식) 또한 김녕 출신이다. 그래서 더욱 적극적으로 역사관 건립을 주도하였다. 김녕역사관의 특징은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가는 역사관’이다. 지금 현재 김녕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앞으로 채울 공간 또한 만들어 놓았다.
내부를 살펴보면 명예의 전당은 각계각층에서 김녕을 빛낸 사람들의 사진과 그 자료를 전시해 놓은 공간이다. 그리고 예전부터 받았던 상장, 앨범 또한 전시되어 있다. 입구에서부터 첫번째는 학교 연혁, 두 번째는 동문 사진, 세 번째에는 명예의 전당 순으로 전시되었다. 2007년 6~7월이 되면서 재일교포 동문들이 방문을 했다. 이때부터 박근남, 강실의를 시작으로 재일교포 사회에서 학교에 돈을 기증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박물관에 그 분들의 사진을 전시하는 공간도 마련되었다. 역대 총동문회장, 역대 어머니회장의 공간도 있다.
김녕의 문화재 : 바다가 있어 멸치 후리는 노래도 있다
김녕에는 국가 지정 유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된 김녕굴과 만장굴이 있다. 용암동굴인 이 두 개의 동굴은 각각 705m, 8,928m이다. 그리고 김녕 앞바다에서는 멸치가 많이 잡혔는데 멸치를 잡으면서 불렀던 멸치 후리는 노래는 제주특별자치도 지정 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기능보유자는 김경생으로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해녀박물관에서 멸치 후리는 노래를 관심있는 일반인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오래된 마을 이야기들 : 『영등물·성세기』
김녕향우회에서 발간한『영등물·성세기』 책자에 따르면 김녕리는 고려 18대 의종 7년(1153)에 탐라군(耽羅郡)을 탐라현(耽羅縣)으로 고쳤으며 최섭경을 탐라령으로 삼고 김녕(金寧)을 비롯해서 14개 현을 두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김녕리는 현 구좌읍과 조천읍의 중심이었다.
김녕리 김호민(金豪敏) 옹의 말씀에 의하면 남흘동(南屹洞) 남쪽 2㎞ 지점에 "삭시꼴이"라는 곳이 있는데 기왓장이 발견됐으며, 현재도 대나무가 있는 속칭「왕개」라는 곳이다. 그는 이 곳이 혈거토착(穴居土着) 지역임을 전하고 있다
이로써 김녕경(金寧境)의 역사는 탐라국의 역사와 함께 함을 알 수 있다. 고려 18대 의종 7년(1153)에 김녕에 현촌을 설정하여 후망대 연대를 구축하였는데, 이것은 입산봉(笠山峯)에 있었던 것을 말하며, 서쪽으로 동복리(東福里) 한마당 봉화대, 북촌리(北村里)와 함덕리(咸德里), 신촌리(新村里)와 삼양리(三陽里) 경계의 동산에 있는 봉대에 연결되는 것이다.
현재는 사라지고 없어진 김녕 향사는 제주시의 관덕정(觀德亭)을 본받아 건축하였다고 전해진다.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화재로 장부와 집기 등 귀중한 유물이 모두 없어졌다. 이로 인해서 김녕리 역사를 대변할 수 있는 상징물이 사라졌다. 임기추(전 노인회장)에 의하면 그래도 어렸을 적부터 마을 어른들의 입을 통해 마을의 역사로 이어져 내려 왔다고 한다.
또한 임기추에 의하면 김녕에는 예전부터 상인들의 출입이 있었고, 조선 시대에는 임금님 진상용으로 수자(袖子), 산귤(山橘), 동정귤(洞庭橘), 치자(梔子), 옻, 동백나무 등을 많이 심도록 장려해서 한양으로 반출했다고 한다.
비석거리가 마을 역사를 설명한다
대충동은 김녕리의 중심 생활권이다. 이 지역에는 비석동으로부터 시작한 정기 시장이 연결되면서 큰 시장이 형성되어 상인의 왕래가 많았다. 임기추(전 노인회장)에 의하면 이 곳은 과거 김녕의 중심거리로, 일제강점기에는 제주시의 본정통과 같은 모든 상업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특히 서포구와 이어지는 곳이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고, 마을 내 큰 행사나 사업을 하고 나서 비석을 세울 때면 이 곳에 많이들 세웠다고 한다. 애초에 비석은 그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이 있으므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옛 서포구 입구 주변에 세웠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가게들도 있었다고 한다. 임기추가 당시 어려서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 대충동의 구 장터거리가 용두동으로 옮겨 와서 성시를 이루다가 동김녕의 동성동으로 가서 김녕장이 되었다고 한다.
돗제(돼지제사) : 돗제퐁낭의 대상, 구렁이인가 입도조상인가
마을 사람들은 김녕사굴에 구렁이가 사는데, 그 구렁이에게 제물로 돼지를 바쳤던 것이 돗제의 유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김군천 씨는 전한다. 그는 한라문화제 행사 준비 과정을 설명하면서 김녕사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김군천에 의하면 돗제는 500년 역사를 가지고 있고 김녕도 그와 비슷한 500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돗제퐁낭은 제일 처음에 들어오신 입도조가 살았기 때문에 그 제일 웃어른에 대한 제사라고 하기도 한다. 따라서 돗제의 기원을 사굴 전설로만 볼 수가 없다.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 보통 3년에 1번씩 이루어지는 돗제는 돼지의 내장을 꺼내고 통째로 올리는 것이 특징인데, 돗제가 끝나면 돼지를 삶아서 동네 사람들에게 전부 대접을 한다. 먹어주는 것이 부조라고 생각하고 따로 부조는 하지 않는다.
집안 살림살이에 여유가 있어야 돗제를 할 수 있다. 돼지가 70~80만원 정도 하고 심방에게 빌게 되면 한번에 20만원 정도 주는 등 전체 비용은 150~300만원 정도이다.
김녕 출신으로 일본에 사는 교포들도 일본 현지에서 돗제를 지낸다. 그러니까 김녕이 고향인 사람들은 어디에 살더라도 돗제를 지내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물론 제주도 내에서도 송당, 덕천, 행원, 동복, 함덕 등으로 이주한 김녕 출신들도 그 곳에서 돗제를 지낸다.
돗제는 집안 행사를 마을 전체 공동 행사로 승화하여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에 서로 상호 부조하는 셈이 되어 마을 주민들 전체가 번갈아 가며 돗제를 지냈다. 어려운 시절에는 돗제를 하고 나면 대부분 마을 사람들과 유대가 강화되었다. 제를 지내면 집안이 편안해진다는 믿음도 있어 병이 나도 돗제를 하는 집안이 있다.
돗제는 주로 봄, 가을, 겨울에 이루어진다. 7~8월은 극심한 더위 때문에 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제를 지내는 사람도 더워서 힘들 뿐만 아니라, 7~8월이 녹두 수확 기간이고 마늘 파종 기간이라 바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름에는 음식도 쉽게 상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김녕의 전설 : 애니메이션으로 개발중인 궤네깃당 전설
김녕에는 전국에도 많이 알려진 '궤네깃당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 전설은 현재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에서 디지털 콘텐츠 작업을 하고 있다. 내용과 완성도에 있어서 문화콘텐츠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학계에서 내린 결론이다. 제주도의 음식 문화를 소재로 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데 목표를 둔 이 작업은 궤네깃당 전설을 소재로 하여 세계적인 애니메이션이 될 수도 있다. 김녕의 전설은 비록 옛 이야기에 지나지 않지만 제주도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재탄생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