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T03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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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健入洞-地理社會環景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
집필자 | 김미진 |
마을이름과 구성
건입동은 제주시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제주항 주변과 동문로터리 동북쪽, 사라봉 서쪽 일대를 가리킨다. 2000년 복원된 산지천을 서쪽 경계로, 사라봉을 동쪽 경계로 하고 북쪽에는 제주항이 자리 잡고 있고 남쪽으로는 일도동이 있다. 건입동은 영주 십경 중 사봉 낙조(紗峯落照)와 산포조어(山浦釣魚)의 아름다움을 지닌 마을이다. 사봉 낙조는 곧 사라봉에 올라 저녁놀이 물든 서쪽 하늘과 바다, 그리고 제주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경치이다. 초가집 대신 고층건물 들어서고 사라봉의 나무들이 자라 시야가 가려져서 옛 정취를 느끼기는 어렵지만 아직도 사라봉에서 낙조를 보기위해 저녁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산포조어는 날이 저물어 어둠이 짙어갈 때 산지포구에서 한가로이 낚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만들어진 말인데 이제는 바다가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볼 수가 없었지만 여름날 바다에 한치잡이 배들이 불을 밝히고 작업을 하는 모습은 바다가 하늘인지 불빛인지 별빛인지 온통 반짝이는 장관을 이룬다.
건입동은 산짓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마을이기 때문에 ‘산지’라 속칭된다. 산짓내 동쪽 일대인 ‘동착의’, 서쪽 일대인 ‘서착의’, 제주동초등학교 동북쪽의 큰 머들이 있는 ‘동대머들’, ‘지장깍동산’, 위쪽 지경인 ‘인무정가름’, 일인들의 적산가옥이 많이 있던 ‘사택의’, 화북과 경계 지점인 ‘으니 루’, ‘공덕동산’, 복신미륵이 있는 ‘미럭밧동네’, ‘지장깍물’과 ‘내깍’을 중심으로 한 ‘지장깍물’, 동네 산짓내 서쪽 서부두 인근 ‘해짓굴’, ‘셋골’, 그리고 ‘앞돈지’, ‘졸락코지’ 동네, 개목, 금산물이 있는 ‘금산물’ 동네, 사라봉 동네 등 작은 마을이 여럿 보여 건입동을 이루고 있었다.
옛날부터 건입동을 ‘건들개’라고 하였다. 포구 주변지역인 ‘개맛동네’를 ‘건들개’라 칭하기도 했다. 『탐라순력도』에는 ‘산지촌(山之村)’으로 그 밖의 옛 문헌이나 지도에는 ‘건입포(健入浦·巾入浦)’로 표기되어 있다. 이것은 한자의 음과 뜻을 차용한 이두식 표기이다. ‘건들개’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 고을나의 15대손 고후, 고청 등 3형제가 신라에 가서 많은 비단과 보물을 받고 돌아올 때 건강한 모습으로 들어온 개의 어귀라 해서 ‘건들개’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둘째, 건입동의 위치와 지형적 조건들을 볼 때 북쪽이 바다이므로 건들바람이 건들건들 불어온다고 해서 ‘건들개’라는 것이다. ‘건들건들’은 시원한 기운을 띤 바람이 연달아 가볍게 부는 모양을 뜻하는 제주어이다. 또 건입동의 옛 이름을 ‘산저포(山底浦)’, ‘산지’라고도 하였다. 진원일(前 제주대 교수)의 글 (『제주도』통권 42호, 1969)에 의하면, 처음에서 발원한 ‘산지천’ 상류의 ‘가락쿳물’(오현단 동쪽)이 ‘건입포’를 지나 바다로 흘러들었기 때문에 ‘산저(山底)’였던 것이 나중에 ‘산지(山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용후는 그의 『제주 옛땅이름 연구』에서, 사라봉 서쪽 발이 뻗어 이루어진 언덕이 해안가에 높이 솟아 산지를 형성하고 있어서 ‘산지’라 하고 있다.
고봉만은 건입동의 마을 명칭에 대해 첫 번째의 의견과 같이 건강하게 잘 들어왔다고 ‘굳셀 건(健)’자에 ‘들입(入)’자를 써서 ‘건들개’라는 이름을 쓴다고 설명한다. 고을라 15대손 고후, 고청, 고개 삼형제가 배를 만들어 타서 신라국에 갔었다고 한다. 신라국에 가서 신라에서 성주라는 칭호를 받아가지고 다시 건입동 포구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건입동 포구로 나가서 다시 들어왔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설명했다.
사라봉은 건입동 387-1번지 일대에 위치해 있다. 봉우리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망망한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고, 남쪽으로는 한라산이 웅장하게 멀리 보이는가 하면, 눈 아래로는 제주시가 한 눈에 들어와 그림같이 아름답다. 특히 저녁 때 붉은 해가 온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지는 광경이 장관이다. 사라봉 정상에는 망양정이 있고, 그 바로 북쪽에는 조선시대 때의 봉수대(제주도기념물 23호)가 복원되어 있다. 현재 사라봉 일대는 공원화되어 있다. 사라봉 동녘 기슭에는 의병항쟁 기념탑, 의녀반수 김만덕의인묘비, 순국지사 조봉호의 기념비와 ‘모충사’가 있다. ‘모충사’ 서쪽은 ‘금산물’을 끌어올려 건입동·일도동, 이도동·용담동·삼도동 일부 지역으로 급수되는 사라봉정수장이 있다. 정수장 바로 서쪽은 ‘충혼각’이다. 이 충혼각은 현재 건입동 포제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 별도봉과 같이 연결되어 공원으로 개발되어 시민의 좋은 놀이터 겸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건입동에 사는 사람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사라봉 입구까지 차를 몰고 와서 세워놓고 사라봉을 오르내리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아침, 저녁으로 볼 수 있다. 새벽 4, 5시 쯤 운동 나온 사람들의 ‘야호’하는 소리가 건입동의 아침을 연다.
고봉만은 영주 십경인 산포조어, 사봉낙조 그 모두다 사라봉에서 보는 것이 제일이라고 했다. 사라봉 정상에 표지판을 만들어 설명해주는 것이 있으면 어렴풋이나마 옛 사람들이 여기서 봐서 이런 걸 느꼈구나 하고 알 수 있으므로 사라봉 정상에 사봉낙조와 산포조어 알림 표지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전순자는 동초등학교 재학 시절 사라봉에 소풍을 갔었다고 하고, 추석 때는 마을 주민들이 사라봉에 가서 놀곤 했었다고 했다. 시내에서 마땅히 놀러 갈 곳이 없으므로 사라봉은 건입동 사람들에게 놀이터, 휴식 공간, 야유회 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던 듯하다. 지금도 운동하는 사람들로 붐비기는 마찬가지이다.
산지천
‘산지천’은 ‘산저천(山底川)’, ‘산짓내’라고도 한다. 이원진의 『탐라지』는, ‘산저천은 성(城) 동쪽 1리에 있다. 즉 가락천의 하류가 2리쯤 바다로 흘러 들어가 건입포가 되었다. 지금은 성 안에 있다’하고 있다. 옛 문헌에는, ‘가물면 마르고, 큰 비가 내릴 때는 ‘산저천’이 범람하여 인가가 잠겼다‘라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산짓내’의 하류를 ‘내깍’이라 하는데, ‘-깍’은 ‘끝’이라는 제주어이다. 그러니까, ‘내깍’은 물 흐름이 끝나는 지점이란 뜻이다. 옛날에는 ‘산짓내’에 은어, 장어 등이 많았으며 진상도 했다 한다.
전순자와 고시열은 산지천에서 빨래를 하던 기억을 되새겼다. 건입동민이라면 누구나 산지천에서 빨래를 하고 물놀이를 하던 어린 시절을 말하고 있으며 건입동 사람들뿐만 아니라 제주성안의 사람들은 누구나 그럴 것 이라고 했다. 90년대까지 산지천은 복개되어 땅 아래에서는 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산지천 위에 붕괴위험이 있는 허름한 상가 건물들이 있었는데 이를 모두 철거하고 2000년 복원을 결정하였다. 지금은 ‘산짓내’가 복원 공사를 마쳐서 도심 속의 공원으로 제주시의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동문로터리 옆에 음악분수가 있어 여름철이면 음악소리에 맞춰 내뿜는 분수 속으로 뛰어드는 아이들을 볼 수가 있으며, 물고기가 노닐고 비둘기도 한가로이 날아든다. 서울에 청계천이 있다면 제주시에는 산지천이 있다.
금산
금산 수원지에서부터 제주 기상대, 중앙교회, 제은상호신용금고 등이 있는 서남쪽 지대에는, 동문로터리에서 볼 때 병풍을 친 듯이 둔덕을 이루고 있다. 부두로 난 도로를 포함한 이 일대 특히, 제은금고 건물 등이 있는 남동쪽 지대가 ‘금산’의 중심지였다. 옛날에는 암벽으로 벼랑을 이룬 이곳에 나무들이 많아서 풍치가 수려한데다가 물이 좋았다. 지금도 금산물은 제주시 일부 지역의 식수원이 되고 있다. 『증보탐라지』 등에는, ‘錦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禁山’이 옳은 표기라고들 한다. 잡 사람의 출입을 금하고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나라에서 금하는 것을 ‘禁山’이라고 한다. 자연 경관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금산 안에 있는 물 때문에 ‘禁山’이란 이름이 붙은 듯하다. ‘포제터’가 있었던 성역이기도 하다. 고봉만은 ‘금산’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은 산을 거쳐야 물이 나오는데 산을 금하는 것은 잡 사람의 출입을 금하여 깨끗하게 쓰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한 산에서 나온 깨끗한 물이라는 것이다. 예전에 금산에는 큰 소나무가 아주 많았었다고 회상했다.
지장샘
‘지장샘’과 ‘산짓물’은 ‘금산 수원지’ 경내에 있다. ‘금산 수원지’ 정문 쪽 ‘금산유허비(禁山遺墟碑)’ 바로 밑이 ‘지장샘’이며, 수원지 건물 서쪽에 있는 물탱크 위치가 ‘산짓물’이다. ‘지장샘’에서 흐르는 물을 ‘지장깍물’이라고 한다. 산짓물 하류 즉, 현 금산수원지 채수원에서 10미터 이내 지점에서 흐르는 물이 ‘지장깍물’인데 옛날에는 바닷가 포구였다. 그리고 바로 옆에 주정공장이 있었을 때는 취수탑을 세워 ‘지장깍물’을 송수하여 썼다고 한다. 옛날 이 근처에 지장보살을 모셨던 당집이 있었다 하여 ‘지장샘’이라 했다 한다. 원천이 깊고 물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지장샘’은 곧장 바다 쪽으로 흘러들었는데, 하류에 고인 물웅덩이를 ‘지장물깍’ 또는 ‘지장깍못’이라 하였다. 빨래를 하거나 우마들에게 물을 먹였던 곳이다. ‘-깍’은 ‘끝’이란 뜻의 제주어이다.
고봉만은 제주시를 옛날 ‘성안’이라고 불렀는데 제주성을 쌓은 안을 가리켜 성안이라 했다. 현재 제주 성지는 두 번째 쌓은 성으로 처음에는 ‘묵은성’까지만 쌓은 성이었는데 먹을 물이 모자라니까 다시 성을 늘려서 금산물을 성안에 담아놓았단다. 그래서 성안에 사람들이 물을 먹고 살게 되었다고 들었다고 했다. 금산 수원지 내에 있는 금산유허비는 1994년 5월 건입동 향토보존회에서 고봉만이 회장을 지내던 당시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현재 건입동사무소가 신축되는 근처는 전순자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이 있던 곳으로 전순자는 금산 아래에 있는 지장깍에 가서 물을 길어오고 목욕도 하곤 했었다고 했다. 지금도 여름에는 산지복지회관에서 금산수원지의 물을 이용한 냉수 목욕탕을 개설하였는데 신경통 등에 많은 효능이 있다고 많은 주민들이 찾기도 한다.
각종 공장 지대
지금 제주시가 많이 발전했지만 그 전에는 모든 것이 제주 건입동이 발상지가 되었다고 고봉만은 말한다. 해저골 동쪽 어귀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오면 다시 서쪽으로 골목이 있다. 그 골목 안에 가정집에서 등피의 부품인 ‘밤부리’를 제조하였다. 등피불에 쓰는 밤부리 공장이 있었는가 하면 탑동 도로변에 서부두 방파제 진입로와 모퉁이 금일횟집 부근에 대패공장도 있었다. 스위스 호텔 근처에 구젱기(소라) 통조림 공장도 있었다. ‘가스오브시’라고 하는 다랑어를 말린 것을 수출하는 공장도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공장이 건입동에 위치했었다. 서부두 방파제 진입로 부근에 옛날 발전기 수리 공업사와 조선 철공소도 있어 배가 드나들면서 고장 나면 고쳐야 했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부둣가에 공장들이 들어섰던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건입동이 발상지가 되었다며 건입동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지금 현대아파트 건물이 있는 곳은 1940년대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 제주주정공장이 있었다. 1만여 평의 제주주정주식회사 상단은 고구마 창고 건물들이 있었고 그 하단은 주정공장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공장 전용수로 시설을 만들어 ‘지장깍물’을 끌어다 썼다고 한다. 이곳에서 제조된 주정은 전국 술 공장에 보급되었다. 상·하단을 잇는 수로와 계단으로 된 통로도 있었다. 상단의 창고 건물은 4·3사건 당시 갱생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제주 주정공장은 1951년 개인에게 불하되었다. 고봉만은 이 공장이 남한에서 제일가는 주정공장이며 굴뚝이 50m나 되어 한라산에 올라가서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주정공장 굴뚝이었다고 설명한다. 건입동 작은 마을 속 여기저기 공장들이 많아 그런대로 밥 벌어 먹는데는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일손들 모자라서 거기가 일 하면 일당들 주었기 때문이다. 또 그 시절에 비행기는 보통사람이 못 타는 거고 전부 배로 왔다 갔다 하니까 부두가 있는 건입동이 제주시와 제주도의 관문인 셈이라는 것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일제시대에 고구마·감자 심으라고 한 걸 수확하면 주정공장의 주원료인 고구마를 공출 받치랴 자기 먹을 것 벌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공출에 대한 기억도 잠시 떠올렸다.
천당밧 가는 구한길
제주여상 앞에서 동쪽으로 나가는 일주도로변 즉, 옛날 ‘니루’에서 크라운호텔 남서쪽 골목으로 30여 미터 들어간 주택가가 ‘천당밧’ 또는 ‘사귀왓’ 지역이다. 옛날에는 건입동이었으나 지금은 일도2동에 속한다. ‘숨굴’이 많은 지경이어서 생긴 이름인 듯하다.
어떤 농부가 소로 밭을 가는데, 쟁기 보습이 땅 속에 박힌 돌에 걸리자 소가 멈칫 섰다. 농부는 습관처럼 쟁기 손잡이와 함께 양손에 쥐고 있던 ‘가린석(가리석)’으로 소잔등을 후려치며 걸음을 재촉했다. 소가 엉겁결에 앞으로 자국을 내딛는 순간, 소의 앞발이 동굴 같은 땅 밑으로 빠졌다. 밭 갈던 주인도 소와 함께 땅 밑으로 빠져 죽었다. 제주에서는 ‘죽었다’는 말을 ‘천당 갔다’고도 한다. 동굴 같은 땅 구멍이 있는 지경이어서 ‘천당밧’이며, 요사스러운 귀신이 붙은 땅이라 하여 ‘사귀(邪鬼)왓’이다.
‘천당밧’ 지경에서 동부산업도로 입구 대로에 이르는 좁은 길이 구 5일장 남쪽으로 이어진다. 이게 옛날의 큰길이란 뜻의 ‘구한질’인데, 건입동과 일도2동과의 경계선이다. ‘천당밧’ 근처에 고봉만의 밭이 있었는데 밭으로 가는 길가는 길은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신작로가 생기기전에 ‘구한질’길은 폭이 좁아서 구르마(마차)에 곡식을 수확한 것을 싣고 집으로 오다보면 길옆의 돌담이나 가시덤불에 부딪혀 곡식 이삭이 많이 떨어지곤 했다고 한다. 그 길가에 고봉만이 퇴비 작업을 했던 분뇨탱크도 있었다고 위치를 설명했다.
향약
마을 회관 앞에 ‘향약’이라고 커다란 돌에 새겨져 있는데 건입동에 향약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나 돌에 새겨놓아 세운 것은 2000년 건입동 마을회에서 세운 것인데 뒤에 보면 고문으로 고봉만 이름도 있다. 고봉만은 지키는 쪽이 더 중요한 것이지 어느 때 어떤 사람이 어떤 직위를 가졌는가 나타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아래는 지금 건입동 어린이집과 마을회관 입구에 있는 향약의 내용이다.
[향약]
우리 마을 건입동은 설촌의 역사가 오래며 탐라 개설 이래 북녘 대륙과의 유일한 문호였으므로 마을 이르는 곳마다 역사가 서려있다. 이와 같이 유서 깊은 우리 건입동 마을에서는 아래와 같이 삶의 지표가 되는 향약을 마련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함으로써 우리의 건전한 삶과 마을의 발전에 이바지한다.
(삶의 지표)
1. 어르신을 존경하고 젊은이를 믿을 수 있는 도덕적인 마을을 구현하자.
2. 이웃의 슬픔을 같이 슬퍼하고, 이웃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자.
3. 우리 마을을 아름답고 깨끗하고 범죄 없는 마을로 가꾸자.
4. 마을의 전통문화를 찾아 다듬고 문화유적을 잘 보살피자.
5. 새로운 지식, 새로운 정보를 알기위해 쉬임 없이 노력하자.
2000.1.1.
건입동마을회
사라진 방화수 물탱크
고봉만의 집 앞 길은 원래 길이 아니었다. 뒤쪽으로 인성 이용원과 어린이 집 까지만 길이 있었고 앞으로도 신작로로 이어지는 길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고봉만의 집 앞 길은 고봉만 소유로 되어 있는데 시청에서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9년여 동안 시청에 드나들면서 길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의 집 왼편으로 있는 팽나무 두 개도 그가 심었다고 했다. 팽나무 아래는 정자처럼 만들어 졌는데 그 밑에는 방화수 탱크 350 드럼짜리가 들어가 있다고 했다. 이 동네에 제일 먼저 정착한 사람으로 고봉만은 동네사람들과 반상회를 하였다. 길이 좁고, 허가가 나지 않아 고봉만의 집 앞으로는 길이 없으므로 불이 나도 불자동차가 들어오지 못하므로 방화수 통을 만들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아 방화수 탱크를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팽나무 아래에 묻혀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