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T02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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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 |
집필자 | 현혜경 |
내가 사는 부친이 부친이 물려준 집
신옥년의 집을 들어서면 안채와 바깥채가 마주보고 서 있고, 마당은 텃밭으로 일궈지고 있었다. 집의 기본 골격을 보자니 꽤 오래 전에 지어진 집이란 생각이 들었다. 신옥년의 말에 따르니 1백년이 넘은 집이라고 한다. 듣기로는 조부 때부터 살다가 조부 사망 후 부친에게 상속된 집이라고 한다. 부친은 목수여서 곧잘 문살이라든가 좋은 재료로 집을 보수했었는데, 지금은 신옥년과 언니가 살고 있다. 언니네 아들들이 일본에 살기 때문에 언니와 함께 아버지가 물려주신 집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상속절차는 밟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형제와 가족들의 동의를 받는 것이 복잡해 그냥 부친 이름에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집을 고칠 때나, 새로운 도로가 집 주변으로 생길 때에도 어려운 점이 많았다고 한다.
집 구조의 변화
신옥년이 어릴 적에만 해도 집은 초가집이었는데, 그 때 집의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 격인 바깥채, 통시(재래식 화장실) 등이 있었는데, 안채에는 방과 정지(부엌), 고팡(창고)이 있었고, 안채는 가족들의 생활 근거지로 사용했다고 한다. 다만 바깥채는 아버지와 작은 오빠가 야학 교실로 사용하기도 하고 손님들의 방문 공간으로도 사용해서 여자들은 바깥채를 이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바깥채를 신옥년이 사용하고 안채는 친언니가 사용하고 있었다. 집은 초가집에서 슬레이트로 지붕을 개량했다가 다시 작년(2005년)에 양철 지붕으로 개량했다. 슬레이트를 덮고 25여년이 넘어가니 물이 새고 슬레이트가 깨져서 개량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원래 집에서 고친 것은 비단 지붕만은 아니었다. 굴묵(방에 불을 지피던 아궁이)을 때던 방은 연탄보일러로 개량을 했다가 기름보일러로 고쳤다. 고치는 김에 목욕탕과 부엌을 집 뒤쪽으로 새로 공간을 내쳐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옆집 작은 아들네가 보일러 계량기를 같이 설치하고자 했지만 목수에게 부탁을 하여 보일러 계량기를 따로 두도록 했다. ‘부모 자식 간에도 곱을 갈랑 살아야지(부모 자식 간에도 구분할 것은 구분해야 한다)’하는 게 신옥년의 이야기이다. 비단 이것은 그만이 아닌 제주도 부모들의 특성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겠다는 투철한 독립정신인 것이다.
연료에 대한 기억
신옥년은 이전 굴묵을 땔 때에는 오라리까지 솔잎을 긁어모으거나 원료를 마련하기 위해 다녔다고 한다. 긴 몽둥이로 누런 솔잎이나 단풍을 닥닥 두르려 떨어뜨린 뒤 그것을 담아 짊어져 오기도 하고, 혹은 ‘검은 오름’ 지경에 올라가면 ‘열한지 들렁귀(지명)’라고 하여서 그쪽 지경에서 나무 장사를 하는 오라리 사람들에게 땔감 나무와 숯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 혹은 그 사람들은 곧은 나무만을 팔아서 굽거나 비틀어진 나무는 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주워다가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락당
용담1동 사람들은 일찍부터 용연 인근의 시락당과 병문천 인근 해륜사지의 미륵부처를 주로 찾았던 모양이다. 시락당은 용담동의 본향을 모시는 당으로 용연 우측의 동한두기 쪽에 위치한다. 시락당은 마을에서 정초에 가내의 평안이나 자식의 장수 등을 빌었던 당으로 용해국대부인, 여리불도, 재석, 삼덕조왕 등을 모신 당이다. 신들은 생산, 물고, 호적, 해녀, 어선 등을 관장한 것으로 기록들에는 드러나는데, 옛날에는 당신이 매우 강해서 용담 전체 사람만 그 당엘 다녔지 다른 동네 사람들은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서쪽에서는 시락당이, 동쪽은 산지 칠머리당이 유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이 변해가니 다른 마을 사람들도 시락당에 가서 비념을 하더라고 신옥년은 이야기한다. 아마 마을마다 있는 본향당은 그 마을 공동체의 신성장소이자, 마을 구성원들의 집합소이기도 했기에 다른 본향당을 모시고 있던 타 지역 사람들은 왕래를 할 수 없었던 듯 하다. 그렇다고 모든 용담 사람들이 이 시락당을 다녔던 것은 아니었다.
용화사 석불
시락당에 비하면 그래도 용화사 경내(용담동 395번지)에 있는 석불 미륵부처의 경우는 좀 나은 편이다. 신옥년에 따르면 어부가 배를 지을 때도 미륵부처에게 가서 빌기도 하고, 집을 지을 때도 용화사의 석불 미륵부처에게 먼저 가서 토신제를 하고 난 뒤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석불 미륵부처를 지키던 용화사의 문보살이라는 분도 돌아가시고, 절은 한라산 중턱에 있는 천왕사에서 맡게 되었다고 한다.
넋들이
예전에는 아이들이 아프거나 하면 심방이나 삼승할망이라고 불리는 무녀를 불러다 넋들이를 했다고 한다. 넋들이라고 하는 것이 찬물과 쌀을 떠놓고 향을 피워 무녀들이 사설을 읊으면서 아기 머리 위로 떠온 찬물을 적시며 “어마 넋들라, 어마 넋들라”하는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간간히 이뤄지는 곳이 있다고 한다.
입춘
용담동의 세시의례는 어떠했을까? 신옥년은 설날이라 하더라도 육지만큼 매우 요란스럽게 지내지는 않았다고 한다. 설날이라야 당시 광양공설운동장에 모여 마을별 축구대회를 하면서 북치고 응원하고 하는 것이 요란한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새철’이라고 불렸던 입춘은 좀 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새철이 든 날은 ‘입춘대길’이라는 글을 써서 입춘이 드는 시간에 대문에 붙이고 액막이굿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입춘날 액막이 의례를 할 때는 하관이 무슨 액이 끼었다고 이야기 하면 시루를 지붕 위에 얹기도 하고, 오곡밥을 해서 절동산에 가서 뿌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이런 의례를 해주는 한학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새철날은 남의 집에 검은 치마를 입고 방문하지 못하도록 했고, 상제가 되어도 나돌아다니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한 때 부친이 돌아가신 고종 사촌이 아기를 업고 신옥년의 집에 입춘날 놀러 왔는데, 어른들이 ‘상제가 어디 가름 돌암잰, 가만히 집이 싯지 않행으네……(상제가 마을을 돌아다닌다고, 집에 가만히 있지 않고……)’라면 야단을 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정월에는 밤늦게 돌아다니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것은 남의 액을 맡아서 들어온다고 금지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액막이로 많은 것들을 방사하고 했다고 한다. 액막이로 ‘새철’이 드는 시간에 보통 방사 글귀를 대문에 붙였는데, 스님이나 한학을 하신 분들이 글을 써주거나 써서 나눠주기도 했다고 한다. 신옥년의 경우 작은 아버지의 큰 아들인 사촌이 선도에 관심이 있어서 한학을 했는데, 입춘날이 되면 동네에 액막이 글귀들을 써주곤 했다고 한다. 입춘은 농사의 시작을 의미했던지 다른 어느 세시 때보다 중요한 날로 인식하고 있었다.
백중
그러다 봄 농사 일이 끝나고 오월 단오와 칠월 칠석이 되면 명절로 인식해 음식을 해 먹기도 하고 백중이 되면 한라산 어리목 근처에 ‘물 맞이’를 가기도 했다고 한다. 물맞이를 갈 때는 미숫가루와 여러 가지 음식들을 싸서 나들이처럼 가기도 했다고 한다. 혹은 절을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제야 사찰을 찾는 것이 잦은 일이 되었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절은 1년에 몇 차례 정도 밖에 갈 수 없었다고 한다. 4월 초파일(부처님오신날)이 되면 동네에서 스님이 잡술 음식들을 야채 위주로 만들어서 단체로 산중 사찰을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