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T0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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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 |
집필자 | 현혜경 |
신옥년과의 이야기는 용담동 옛 지경들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신옥년의 기억을 빌리자면 해방 후까지 용담동에는 집들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간간히 한천까지 이어지는 길가에 상점들만이 있었다고 한다. 현 서문시장 인근에도 집이 거의 없었고, 서문시장 위로는 거의 소나무밭이었는데, 시신을 묻는 묘지들이 그곳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한두기 근처나 부러리 근처 서문시장 앞 정도에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2001년 용담동지 편찬위원회의 『용담동지(용담동지편찬위원회, 2001)』에 살펴보니, 지금 서문시장 터에 큰 묘가 있었다고 한다. “보성군수를 지낸 양씨 집안의 묘였기 때문에 ‘양묘전’이라 했던 것이 ‘양모전’이라 불렀다. 보성군수를 지냈다 해서 ‘양보성 산’이라고도 했다.” 기록으로 보아도 서문시장 위쪽은 묘지로 썼던 소나무밭이 있었던 모양이다.
신옥년 말에 따르면 용담이라고 해서 현재처럼 용담1동, 2동, 3동으로 구분하지 않고 해방 후 한참까지도 용담동에서 ‘다끄네(지명)’와 ‘비행장’ 지역만을 분리하여 구분지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용담1동에만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용담2동은 전부 밭이었다고 한다. 용담3동은 래물 지역이라고 불렀는데, 용담과 도두리의 경계 지역에 위치한다고 한다. 당시 다끄네만을 그렇게 구분지었던 것은 용담1동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데, 다끄네 쪽 사람들은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했던 사람들이 살고 있던 동네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런 구분을 보면 현재의 행정적 구분은 사람들의 삶의 냄새를 배제한 인위적인 느낌이 난다.
용담동 공간에 대한 급작스런 변화의 첫 발은 일제 합병 후 제주목 관아의 성곽을 철훼하고 새로운 도로를 개설하는 1920년대부터 나타나는 것 같다. 1913년 북문이 철훼되는 것을 시작으로 1914년에는 동문과 서문이, 1918년에는 남문이 철훼되었다. 용담동 지경에 해당하는 서문의 철훼는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에서 관덕정을 거쳐 ‘산지’ 항구로 이어지는 전쟁 물자 수송 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1920년대 중반 이후 제주의 도시 공간은 새로운 도시 공간 질서 속에 본격적인 일식 관청 및 건축이 들어서게 되는데, 관아부지에 일제의 관청 건물이 들어서고, 그 주변으로 일식 상가와 건축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옥년의 말에 따르면 이 시기에 관덕정 우측으로는 한국 사람들이 살지 않고, 일본 사람들만 살았다고 한다. 관지기들이 모두 일본 사람들이었기 관청 인근에 살았다는 것이다.
해방이 되고 나서 용담동의 최초의 행정적 구분은 1955년 8월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제주서초등학교에서 1986년에 발행한 향토지 『용두암의 향기』 29쪽을 살펴보면 ‘1955년 8월 1일자 법률 제368호에 의하여 제주읍이 9월 1일 제주시로 승격되자 같은 해 12월 31일자로 제주시 25개 리가 40개 동으로 개편됨에 따라 용담리는 병문천 서측과 한천 동측을 용담1동으로, 한천과 도두동 다호부락 및 용두암을 연결하는 용담2동, 다끄네(수근동)와 어영부락을 용담3동으로 구분하게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1962년 1월 1일 말단 행정기구 강화라는 조치로 제주시 40개 동이 14개 행정동으로 다시 통합될 당시 분동되었던 용담동도 통합되었다가 1985년 10월 1일 제주시 조례 1034호로 본동을 1동과 2동으로 재분동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한 동(洞)의 대표를 동장이라고 하여 제주시에서 파견하지만, 옛날에는 구장이라고 해서 마을의 원로가 마을의 대표를 담당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에 신옥년의 남편이 구장을 도와 현재 용담2동 근방에 있는 사무소에서 마을 시무를 보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런 덕분인지 신옥년은 ‘여자들은 쓸데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잘 모른다’고 하면서도 다른 분들에 비해 마을에 대한 옛 상황을 많이 기억하고 있는 듯 했다.
오일장이 열리는 날은 관덕정 앞에서 서문다리를 거쳐 서문시장까지 행상이 들어섰고, 인근 어부들이 잡은 바닷고기를 가지고 와서 팔기도 할 정도로 장이 호황이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용담1동에 사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지만 시장이 서는 날이면 용담1동이 당시 제주시의 중심가임을 여지없이 드러내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일장이 이전되자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매일시장이 들어섰지만 오일장이 있을 때만큼의 호황은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한천초등학교에서 1987년에 발행한 『향토지』 23쪽을 찾아보니, ‘한국전쟁 이후 1952년경에 문씨의 좌전이었던 밭(현 서문시장 남쪽)을 중심으로 용담동민의 진정에 의해 시장으로 되었다. 처음에는 오일장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매일장으로 발전하였다. 설시 당시에는 초가집 20여 채, 판자집 10여 채, 음식점 3-4채가 고작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초기 서문시장은 오일시장의 호황을 그대로 받아서 누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1960~80년대 들어서서 서문시장 위쪽으로 집들이 생겨나고 주택가와 도로가 형성되면서 서문시장은 다시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옛터의 흔적들은 재고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