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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심 할머니의 일생의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1017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
집필자 문순덕

약혼식

김금심은 1955년에 약혼식을 했는데 신랑집에서 한복 한 벌, 금반지(쌍가락지)와 시계를 받았다. 시아버지와 친척 몇 분을 신부집에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했으며, 이것이 약혼식이었다. 이날 사주단자도 갖고 온다. 그 해 가을로 결혼날짜를 잡았는데 영장이 나와서 한 2년 미뤄졌고 은행원이어서 직장생활을 했다.

결혼 예단

김금심이 결혼할 때 시댁친척들한테는 버선 한 켤레가 최고 예단이었다고 한다. 김금심 친정에서도 한두 달 걸려서 이불, 방석, 한복과 버선을 만들었다. 가족들이 다 만들 수 없으면 바느질 잘 하는 사람을 청해서 혼수품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버선은 광목에 솜을 넣어서 만드는데 상대방(시가 친척들) 발 치수는 잘 모르니까 대강 크게 만들며 시아버지의 형제간까지 주었다고 한다. 시동생들에게는 나일론 양말이 처음 나올 때니까 나일론 양말을 주고, 시누이들은 나이가 어리니까 일제 화장품을 주었다고 한다.

시집가는 날

결혼식 전날 미용사가 신부집에 와서 신부화장과 머리를 손질해 주었으며, 김금심은 파마머리에 면사포를 썼다. 결혼식날 아침 풍경을 보면 신랑이 신부집으로 도착하고 예장이 통과되면 신랑방으로 초대된다. 신랑방에는 우시가 같이 앉고 신부방에는 신부 친구와 여자 우시(상객)가 같이 앉았다. 우시는 두 사람 정도 다녔다. 신랑집 우시는 구덕에 ‘정종(청주) 한 병, 돼지 다리 하나, 쌀’을 담고 온다. 옛날에는 이 구덕을 하인이 지고 다니다가 나중에는 여자우시가 들고 다녔다. 신부집에서는 답례로 빈구덕을 보내지 않고 적당한 음식을 넣어 보냈다. 우시(상객)는 외가 대표, 친가 대표로 2~3명이 갈 수 있고 형제도 갈 수 있다. 결혼식이 끝나면 빨간 다홍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었는데 빨간색은 잡귀를 물리치고 노란색은 오래 살라는 뜻이라 한다. 가문잔칫날은 친정부모가 만들어준 한복을 입고 결혼식이 끝나고 시댁으로 들어오면 시부모가 만들어준 한복을 입는다.

김금심은 귤림회관에서 예식을 마치고 시댁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잤다. 그 때는 제주시에 호텔도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면 시댁에서 시어른이 아침을 준비해 주었다. 시어머니가 젊어서 당신의 부엌살림을 만지는 것을 거북해 하고 나중에 늙으면 거들어 달라는 정도였다고 한다.

사둔(돈)잔치

결혼식 다음날은 신혼부부와 시아버지가 이바지음식(술과 돼지고기)를 갖고 사돈댁에 동행한다. 김금심은 친정에서 시댁으로 올 때 떡을 만들어 간 기억이 있다고 했다. 제주도에서는 약혼할 때에 상견례를 해도, 결혼식이 끝나면 다음날 정식으로 사돈인사를 하는데 이를 ‘사둔(사돈)잔치’라 하며 요즘은 결혼식날 겸하기도 한다. 친정에서 사둔잔치 후에 음식을 나눠 먹고 형편에 따라서 하루 머물다 가기도 했다. 김금심은 친정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시댁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예식이 끝난 후에 시댁에 친정 부모는 가지 않고 우시로 간 친척들만 인사했다.

신접살림

김금심은 결혼 후 남편이 군 복무 중이고, 시부모와 같이 살 형편이 아니어서 한 7개월은 친정에 살았다. 그 당시는 먹고살기 어려워서 10대 소녀들이 가사도우미로 활약했다. 식모(가사도우미)가 집에 같이 살아서 살림살이와 아이 키우는 것을 도와주고, 가끔 시어머니도 와서 도와주니까 가정주부로 살아가는데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고 한다. 1950년대 제주시에서는 식모(가사도우미)에게 숙식만 제공해 줘도 되었는데 1960년으로 접어들면서 돈을 지불하기 시작했다. 매달 월급을 받기도 하고, 일년치 선불을 요구하기도 했다. 김금심은 20전인 1980년대 후반까지는 가사도우미를 두었고 그 후에는 일주일에 3~4회 정도 도움을 받았다. 가을철에 과수원 농사를 할 때 손이 필요해서 가사도우미를 청했다. 그러다가 전혀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이 한 10년은 됐다고 한다.

자녀출산

김금심은 1957년 김홍식과 결혼해서 슬하에 3남매(2남1녀)를 두었으며, 큰아들은 제주대학교 교수이고, 둘째아들은 대학병원 의사이다. 김금심은 아이를 더 낳고 싶었지만 몸이 약하고 임신이 잘 안 돼서 3남매로 만족해야 했고, 남편(김홍식)은 5남매쯤 있었으면 바랐다고 한다. 김금심은 결혼해서 처음부터 아들 2명을 낳아서 아들낳기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고 한다.

출산도우미(산파)

김금심이 출산할 당시에 제주시에서는 주로 산파가 집에 와서 출산을 도와주었으며, 집에서 낳기가 어려우면 병원으로 가는 정도였다고 한다. 제주시에 장산부인과가 생기고(광복 후), 그 다음에 고산부인과가 있었다. 우선 임신하면 장산부인과에 가서 건강검진을 하고, 출산하게 되면 출장 산파를 청했다. 조산원에서 산파가 집에 와서 동정을 살펴 주기도 했다. 김금심은 3남매를 김상휘 산파의 도움으로 출산했다고 한다. 김상휘 산파는 1950년대 중반부터 전문 산파로 활약했다. 안방에서 출산하면 그곳이 산실이었다. 지금처럼 아프면 환자가 병원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의사가 왕진을 다녔다. 중환자가 있으면 처음에는 자전거를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오토바이를 이용해서 왕진을 다녔다. 출산 왕진비는 돈으로 지불했다고 한다.

출산 음식

제주도 풍속에 출산일이 다가오면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가 메밀가루를 준비한다. 출산하고 맨 처음에는 아기를 낳으면서 워낙 고생을 했으니까 메밀가루를 묽게 반죽해서 아주 부드럽게 하고, 냉수로 반죽하면 딱딱하니까 따뜻한 물로 반죽한다. 이것을 얇게 해서 펴서는 숟가락으로 떠서 먹었다. 또한 미역을 참기름에 볶다가 물을 넣고 끓이다가 메밀가루를 뜨거운 물에 넣어서 숟가락으로 잘 젓고 소금 간을 해서 먹었다. 출산 후 일주일이 지나면 메밀가루가 적당히 굳을 정도로 냉수로 반죽해서 먹는데 약 보름간 메밀가루 수제비를 먹는다고 한다. 김금심도 출산 후에 메밀가루음식을 먹었으며 며느리가 출산할 때 미역과 메밀가루를 준비해 주었다고 한다. 며느리가 미국에서 살 때 출산하게 되니까 제주도 출산음식을 준비해서 가져갔다고 한다. 김금심은 두 며느리가 육지(제주사람들은 제주도 이외의 다른 지방을 육지라 함)사람이어도 제주도음식이라 하면서 만들어주니까 잘 먹었다고 한다.

쑥물과 배냇저고리

김금심이 출산하면 산파가 3일간 하루에 3~5번까지 산모 목욕을 시켜주었다. 아기는 그냥 물로 씻고 산모는 3일째부터 쑥으로 몸을 문지르기도 하고 그 물로 목욕도 했다. 김금심은 딸이 출산했을 때도 이렇게 해 주었다고 한다. 본인이 출산했을 때 곤밥(쌀밥)을 먹었고, 산파가 두부는 며칠 후에 먹으라 한 것 같고, 사과처럼 신 과일은 이빨이 상하니까 당분간 먹지 말라는 주의사항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 어른들은 삼베로 봇뒤창옷(배냇저고리)을 만들었는데 김금심은 한 여름에 출산을 해서 명주로 배냇저고리를 만들어 입혔다. 삼베는 까실까실하고 명주는 아주 얇으면서도 부드러운 것이 있었다. 배냇저고리를 세 개 만들어서 번갈아 가면서 입혔다. 이 옷은 시어머니가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아기가 입었던 옷은 함부로 버리지도 않고 걸레로도 사용하지 않는다. 3남매를 키웠던 배냇저고리는 2004년까지 보관하고 있다가 처리한 것 같다고 한다.

돌잔치

김금심은 세 아이를 키우면서 백일 때는 백일상도 차려주고 사진도 찍어주었다. 돌잔치는 백일잔치보다 조금 크게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1960년대 초부터 제주시에 사진관은 여러 군데 있었다. 큰아들 돌사진은 다 찍어 두었는데 다른 아이들은 사진을 못 찍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부터 48년 전이니까 사진기가 별로 없을 때거든. 그때 서울에서 우리 친척아이가 대학생이어서 여름방학 한 달 동안 우리집에 살았는데 카메라 좋은 것을 가지고 있었어. 우리집 큰애가 돌이니까 자기가 연습 삼아 사진을 찍겠다고 해서 하나에서 열까지 다 찍어줬어요. 그런데 다음 애들은 백일, 돌을 다 해주어도 사진은 안 찍어줬거든. 독사진은 찍어줬어. 그 옛날에 카메라가 있어 뭐가 있어. 그러니까 사진관에 가서 백일, 돌은 다 찍어주었는데 집에 사진사를 청해서 돌상 차린 사진이 없는 거라. 요즘 같으면 악착같이 어디 가서 불러다가도 찍어주겠는데 그때는 마음의 여유라든지, 또 돌사진을 찍는 풍습이 유행하지 않아서 튀게 보이고 싶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기회가 닿으면 사진이라도 찍지만 번거롭게 사진사 불러다가 찍는 것이 어색하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증거가 엇주게. 사진 찍은 증거가 없으니까 돌잔치를 안 해 줬다고 할 거 아니?"

어린이날 풍경

김금심은 아이들을 키울 때 어린이날이라 해서 요즘처럼 특별행사를 하지는 않았고 운동회가 큰 행사였다고 한다. 나중에 어린이날 행사를 하니까 자장면을 사 주는 정도였고, 제주시에서 중국음식점은 아주반점이 유명했으며 여기를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김금심이 아이들을 키울 때는 특별한 날에 자장면을 사 주는 정도였다. 부모들이 외식을 즐기지 않아서 집에서 특별한 음식을 자주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집에서 식빵, 비스켓 등을 만들어 주었다. 친정아버지가 서울에 다녀올 때 특별히 부탁해서 전기오븐을 구입했다고 한다(1965년).

상장례-호상옷 준비

김금심이 생각하기에 대부분 사람들이 60세가 넘어가면 거의 호상옷(수의)을 준비한다고 한다. 속설에는 윤달은 손이 없는 달이어서 이 때 수의를 만들면 좋다고 하지만 한쪽에서는 근거 없는 말이라고도 한다. 김금심이 보기에 수의는 각자 형편에 맞게 아무 때나 준비하면 되는데 윤달에 만드는 풍습이 있다고 보았다. 수의를 만들면 몇 십년간 보관하는 것이 중요하다. 옛날에는 좀약도 없고, 보관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지금은 약품도 잘 나오고 일년에 한번 정도 날씨가 좋은 날 바람을 쐬고, 포장을 해서 보관한다고 한다.

김금심은 호상옷은 한 십년 전에 만들었다. 호상옷을 미리 만들면 보관도 잘 해야 하는데 사람들마다 보관법이 다르기는 하지만 김금심은 창호지에 싸서 사이사이에 향을 넣고 전체를 광목을 싼 후에 다시 보자기로 싸서 보관하고 있다. 좀약(나프탈렌)을 궤 속에 넣어 두면 약 냄새가 심해서 일년에 한 번 정도는 바람을 쐬게 해야 한다. 김금심의 부모세대들은 칠월칠석날 날씨가 좋으면 햇빛에 말렸다. 그런데 아무 날이나 하는 게 아니고 인일, 축일, 범날, 쇠날, 쥐날 같은 날은 안 내놓고, 말날은 햇볕을 쐬기도 했다. 내 생각에는 옛날에는 좀약도 없고 통풍도 잘 안 되어서 좋은 날을 보면서 환기시켰다고 본다. 김금심은 2005년에 호상옷을 햇볕에 말렸는데 칠월칠석이 아니라도 환기시키기에 좋은 날을 택했다고 한다.

장례 풍습의 변화

김금심은 시어머니가 아파서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갔는데 가망이 없다고 하니까 집으로 모셨다. 김금심 시아버지(1976년, 66세에 사망)는 아주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는데 유교적 풍습대로 집에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김금심 시아버지 돌아가실(1976년) 때는 장지에서 끝나면 집에 와서 삼우제까지 지냈는데 요새는 장지에서 다 마치고 오니까 집에 와도 할 일이 없다. 그리고 삼년상을 하다가 일년상으로 축소되고 49제 때 탈상을 하니까 너무 많이 변했지만 앞으로는 따라가야 할 것 같다고 한다.

김금심은 친정어머니가 1993년에 돌아가셨는데 일년상을 했다. 초하룻날 삭제를 지내고 상식은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1996년에 돌아가시니까 삭제는 한 달에 한번 하고, 상식은 안 했다. 소기를 야제로 간단히 하고 친척들만 참여했다. 친정아버지가 2000년에 돌아가셨는데 김금심이 병원에서 장례식을 치르려고 하니까 친척 어른들이 병원에서 지낸다면서 흉을 보기도 했지만 오히려 좋다고 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요즘 전문장례식장을 이용하는 것은 도시에서 보편화되고 있다. 2000년에 친정아버지 돌아가실 때는 삭제는 하고, 야제를 해서 형제들과 자손만 참석해서 간단하게 지냈다.

요즘 김금심 친구들이 모이면 장례식에 대한 이야기도 나눈다고 한다. 대개 40%는 화장을 원하고, 나머지 친구들은 매장을 선호하는데 화장이든 매장이든 본인들이 고민할 것이 아니고 자식들이 알아서 할 문제라 하면서 ‘살아있는 것이 머슴이다.’라는 말을 한다고 한다. 그래도 사회에서 처음 ‘화장’을 이야기할 때는 거부하던 사람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동조하는 분위기라 한다. 집안에 따라서 가족공동묘지가 있어도 매장을 하면 자손들에게 벌초 등 피해를 주게 되니까 화장을 선호하기도 하고, 또 한쪽에서는 한 번 죽는 것도 서러운데 화장을 하면 불에 태우니까 두 번 죽는다고 생각해서 매장을 하면 자연으로 돌아가는데 왜 화장을 하느냐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제사물림

김금심은 제사명절을 두 아들에게 분제할 거라 한다. 아직은 제사를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았지만 더 있다가 물려줄 예정이라 한다. 제사명절을 준비할 때 힘든 점도 있지만 며느리에게 물려줘버리면 섭섭할 것 같기도 하고, 조상의 입장에서도 자식의 봉사를 받는 것과 손자의 봉사를 받는 것은 다를 것이라 한다. 옛날같이 친척들이 많이 참석하면 음식준비도 힘들지만 요즘은 직계가족만 간단히 지내니까 의례 준비도 어렵지 않다고 한다.

제사음식준비

김금심 친정할아버지 때에는 제사음식을 주로 남자들이 장만했는데 아버지대로 내려오면서 여자로 넘어왔다고 한다. 김금심 기억에도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적갈 등을 만드는 것을 봤는데 얼마 없어서 친정어머니가 만들었다고 한다. 나중에서는 여자들이 적갈을 만들고 쟁반에 음식을 놓고 젯방으로 가져가면 남자들은 진설만 했다고 한다. 젯방에서 남자들은 설상을 하는데 가끔 김금심도 직접 진설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남자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제 시간에 집에 올 수 없으니까 형편에 따라서 여자들이 제사의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고 본다.

김금심 친정할아버지가 제사음식을 정성스럽게 준비했던 과정을 말해주었다. 김금심이 초등학생일 때 외할아버지는 제사하기 열흘 전에 쇠고기를 추렴한다. 그 당시는 냉장고가 없으니까 쇠고기를 끈으로 묶어서 간장에 2~3일간 담가두거나 소금간을 해 두기도 했다. 친정할아버지는 납읍(제주시 애월읍)에 사셨으니까 저장한 쇠고기를 제주시 삼도2동 아들집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제사음식준비는 남자가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여자가 생선이나 적갈을 마련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집안마다, 시대마다 다르기는 해도 제사를 통한 조상숭배를 아주 중요하게 여겨서 제례음식 준비에도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구분했다. 제사와 성묘를 집안의 중요한 임무로 여겼다고 본다. 김금심 친정아버지는 공무원이어서 제관 역할을 잘 할 수 없었다. 즉 광복 전에 제사를 물려받아서 1~2년만 적갈을 만들다가 공무상 다른 지방으로 가게 되니까 그때부터 친정어머니가 모든 제사음식을 장만했으며 김금심은 큰딸이어서 어머니를 보좌하면서 많이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친정할아버지가 하던 것을 옆에서 지켜보기도 했지만 많이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이지만 지금도 제사의례는 많이 기억한다고 한다. 김금심은 제사하기 3일 전부터 조금씩 준비하는데 생선을 사다가 말린다. 다음에는 단골상점에 가서 적갈용 고기를 사오고 당일에는 전부치기 등 제사음식을 만든다. 제수용품을 사러 동문시장에 다닌 지가 한 7~8년 된 것 같고, 요즘은 가까운 마트를 이용한다고 한다. 제수용품 구입 시 특별히 주의하지 않고 집에서 장만할 때 정성을 들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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