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T0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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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 |
집필자 | 문순덕 |
김금심 할머니가 살아온 이야기
김금심의 부친 김태준은 법원 서기로 출발해서 전주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한 후 제주도로 내려와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변호사로 일생을 보냈다. 일제강점기에는 법원 사무원이었고 광복 후에 사법제도가 바뀌면서 법관이 부족하니까 임시 법관 후보 시험이 있었다. 그 시험에 합격해서 판사가 되었다. 서울법원에 시보로 있다가 4·3사건 때는 서울에서 근무했고 그 후 제주도로 내려왔다. 전쟁 후에 전주지방법원 판사로 있었는데 김금심 친정할머니가 돌아가시니까 집안을 돌봐야 해서 제주도에 와서 변호사의 길을 가게 되었다. 김금심의 친정아버지는 애월초등학교(제주시 애월읍 소재)를 나와서 제주농업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14~15세에 고향인 납읍을 떠나서 제주시 묵은성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김태준은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외아들이니까 부모님이 서둘러서 18세에 결혼했으며, 전남 광양으로 근무지가 옮김에 따라서 그곳에서 김금심은 태어났다.
김금심은 1932년 11월 29일생이다. 본적은 제주시 삼도2동이고 친정 할아버지는 애월읍 납읍리 출신이고 친정어머니는 애월읍 곽지리 출신이다.
전쟁에 대한 기억
김홍식은 태평양전쟁 말기에 광주로 유학을 가버리니까 잘 모르지만 김금심이 기억을 더듬어서 전시의 어려운 형편을 말해 주었다. 제주시에서는 놋그릇도 공출하니까 놋그릇을 감추기도 하고, 국민학생 때 사라봉에 가서 잔디를 캐왔다고 한다. 3학년은 석 장, 4학년은 넉 장, 5학년은 다섯 장을 숫자대로 캐서 매일 학교에 가서 바쳤다고 한다. 그 잔디는 비행장을 만드는데 사용했다. 고구마 줄기도 바쳤는데 제주시 아이들은 고구마줄기가 바치지 못하니까 솔방울(겨울 난방용 땔감으로 사용함)도 공출했다고 한다. 김금심 등 당시 학생들은 꾀가 생겨서 뻣뻣한 새 가마니에 조금만 담아도 많아 보이게 담고 고사리도 꺾어서 바쳤다고 한다. 김금심은 초등학교 때 양말을 신고 가 보지 못했다. 양말을 신고 학교에 들어가면 벗어서 숨겼다. 그리고 맨발에 게다(일본 나막신의 일종)를 신었다. 운동화는 일 년에 한 켤레 배급으로 줬다. 얼마나 아까운지 배급받은 운동화가 닳아질까 봐 조심했으며, 신발도 꿰매서 신었다고 한다.
가죽고무신에 대한 추억
제주시 서문통(관덕정 서쪽) 대양상회 옆에 양화점이 있었다. 고무신도 어렵던 시절에 신발이 빨리 닳아지니까 하루는 김금심 친정아버지가 양화점에 가서 돗(돼지)가죽으로 구두를 맞춰주었다. 이 가죽은 요즘처럼 가공이 잘 안 된 재료이다. 그런데 6학년이 되니까 발은 커 가는데 신발은 사이즈가 그대로여서 발이 아파서 신을 수가 없었고, 작은 신발을 무리하게 신어서 발가락이 구부러지기도 했다. 너무 발이 아파서 가죽신을 신지 못하겠다고 하고 잊어버렸는데 친정아버지가 잘 보관해 두었다가 전해 주었으며, 김금심은 그 신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