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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11547
한자 流配人
영어음역 Yubaei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동전

[정의]

조선시대 죄를 지어 그 형벌로 제주 지역으로 귀양 왔던 사람들.

[개설]

유배는 오형(五刑) 가운데 하나로 죄인을 귀양 보내던 형벌인데, 유배인을 귀양 보낼 때는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원근(遠近)의 등급이 있었다. 제주도는 조선왕조 500년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귀양살이 했던 곳이다.

조선시대는 왕족이나 중신 그 누구를 막론하고 왕명을 거역하거나 정사에 과실이 있을 경우, 그 경중에 따라 사형이 아니면 아주 먼 곳에 유배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제주는 수륙천리에 교통 또한 불편하고, 본토와 격리된 절해고도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유배지로는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유배의 분류]

유배는 부처(付處)·환도(還徒)·안치 등 세 가지로 분류된다. 부처는 주로 관리들에게 내려진 형벌로 유배지 관내 수령에게 유배인 관리에 대한 재량권을 일임하는 것이다.

환도는 범죄인을 고향에서 약 400㎞ 이상 떨어진 곳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을 말한다. 안치는 다시 본향안치·위리안치·절도안치로 구분되는데, 본향안치는 죄인을 고향에 유배시키는 것으로 가장 가벼운 형벌이라 할 수 있다.

위리안치 혹은 가극안치는 집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탱자나무 등으로 가시덤불을 쌓고 그 안에 유배인을 유폐시켰다. 절도안치는 유배에서 가장 가혹한 조치로 중죄인을 원악(元惡)의 도서에 유폐시키는 형벌이었다.

[유배인의 신분]

조선왕조 약 500년 동안에 20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들 중에는 1722년(경종 2) 4월에 유배된 신임과 같이 84세의 최고령자가 있었는가 하면, 소현세자의 3남 석견(石堅)은 4세로 가장 어린 나이였다.

유배자의 신분도 위로는 폐주(廢主) 광해군을 비롯하여 왕족과 외척·문무양반·학자·승려·환관 및 서울의 도적과 북방 국경지방의 월경범(越境犯)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특히 정조 때 유배되었던 조정철은 무려 29년(1777~1805)이나 제주목·대정현을 오가며 귀양살이하였다.

[유배인의 동향]

제주도로 유배되는 경우는 거의 종신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유배형에 있어서 일정한 기한이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정세 변화에 따라 사면되어 석방되거나 다른 곳으로 이배되었을 뿐이다.

때문에 제주도에서 10여 년의 유형생활을 보낸 사람도 많았다. 그들 중에는 중종 때의 김정처럼 사사되는 경우도 있었고, 사면된 뒤 재환(再宦)의 길이 열려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경우도 있었다.

혹은 1807년(순조 7)의 조정철처럼 유배지였던 제주도에 목민관으로 부임해오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는 제주도에 정착하여 입도 시조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주요 유배인]

조선 전기에 제주도로 귀양온 유배인은 조선 개국에 반대하였거나 왕자의 난, 무오·갑자·기묘사화에 연루된 자, 왕명을 거부한 자, 을묘왜변에서 패전한 자, 정여립 사건의 연루자들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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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조선 전기 주요 제주도 유배인 일람표

조선 후기에는 제주를 비롯한 섬 지역에 유배가 많이 이루어졌는데, 제주도는 그 중에서도 정치적인 인물들이 주로 유배되었다. 더구나 정치적 변화가 매우 심하게 일어나면서 정치적 사범이 많이 속출되었고, 권력의 쟁탈 과정에서 서로 상대세력에 대한 축출이 빈번하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유배되는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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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조선 후기 제주도 주요 유배인

한말 역시 김윤식·박영효 등을 비롯해서 정치적인 거물들이 제주에 유배되었다. 김윤식은 온건개화 세력으로 친청적 입장을 견지하던 인물이었으나, 아관파천으로 친러정권이 들어서자 민비시해의 음모를 사전에 알고서도 방관했다는 이유로 제주에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생활 동안 제주유림 김응빈홍종시 등 제주 출신 10여 명과 귤원시회를 만들어 활동을 전개하였다.

고종의 사위였던 박영효는 3개월 만에 사별하고 갑신정변, 고종폐위 음모 등으로 두 번의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가, 1907년 귀국하여 정치일선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다시 대신암살 음모로 제주에 유배되었다. 박영효는 유배되어 있는 동안 뮈텔 신부를 도와 제주도 최초의 근대 여성학교인 신성여학교 개교에 힘썼으며, 원예농업에 힘을 기울여 제주 원예농업 발전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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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구한말 제주도 주요 유배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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