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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11546
한자 水軍
영어음역 sugun
영어의미역 nav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동전

[정의]

조선시대 제주 지역 인접 바다에서 국방과 치안을 담당한 군대.

[개설]

제주 지역에 대한 왜구의 빈번한 침입은 제주 방어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필요로 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 말 봉수제의 설치나 1408년(태종 8)에 10척의 병선을 제주에 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취해진 조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주도의 관방시설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는 1439년(세종 21)에 이루어졌다. 이에 제주도안무사 한승순은 기존의 방어 시설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외에 제주 방어에 대한 몇 가지 조치를 취하였는데, 그 중 호공(蒿工) 1명, 사관(射官) 2명을 두어 수군을 강화할 것을 건의하였다.

[변천]

제주를 방어하기 위해 종전에는 육군과 수군이 있었으나, 병력이 부족하여 수령들은 이를 충당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1664년(현종 5) 3월에 충청감사 이익한(李翊漢)이 다음과 같이 의견을 올렸다.

“신(臣)이 일찍이 제주목사를 지내면서 보니 제주에는 전선이 있는데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민폐가 적지 않습니다. 제주 바다는 조석수(潮汐水)가 없고 상시 파도가 하늘에 닿으니 전선 관리가 힘듭니다. 만일 적선이 순풍 때 오면 전선을 사용할 수 있지만 역풍인 때는 전선도 오지 못합니다. 섬 백성들은 힘들여 전선을 만드나 나중에는 부패되니 이를 변통함이 좋을까 합니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묘당(廟堂)에 의논하도록 하니 비변사에서는 같은 해 8월 윤심(尹深)을 시재어사로 보내어 그 실정을 알아오도록 하였다. 윤심은 같은 해 11월에 과장을 설치하여 문과에 문영후·고징후·고홍진 등을, 무과에서는 문창업 등 4명을 시취하고 돌아가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제주의 해변 형세를 살펴보니 사면이 암석으로 되어 있어 배가 정박할 수 있는 곳은 7~8개소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전선을 방어하는 기구로 사용하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또 제주의 수세(守勢)는 내륙과 달라서 풍랑이 험하므로 전선을 마음대로 운행하지 못하고 항시 포구에 매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위급한 때를 당하여도 쓸 수가 없음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선을 수리하고 개조해야 하니 민력(民力)이 갈진(竭盡)되어 이것이 제주에서는 민막(民瘼)입니다. 또 내수사(內需司)의 배도 원래는 41척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노후하여 없어졌는데 내수사에서는 여전히 수세(收稅)하고 있으니 이게 또한 고폐(痼弊)입니다.

또 제주 백성들은 10세 이상만 되면 남녀를 막론하고 병적(兵籍)하여 요역을 과하고 있는데, 대정현의 경우 146명밖에 없습니다. 대정현은 토질이 좋아서 쌀과 면화가 잘 되니 제주목 백성들이 옮겨와서 누대에 걸쳐 경작하나, 요역은 제주목의 리적(里籍)에 있다 하여 사역(使役)하지 않으니 도중(島中)의 요역이 고르지 못합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제주의 수군을 폐지하고 내수사의 선세(船稅) 징수를 정지시켰으며, 대정현에서 경작하는 백성은 대정현에서 요역에 응하도록 하였다. 1667년(숙종 3) 5월에 비변사에서는 제주목사 윤창형(尹昌亨)의 장계에 의하여 전선을 혁파한 대신 도근천(都近川)·화북(禾北)·독포(獨浦)·모슬포(摹瑟浦)에 축진(築鎭)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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