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115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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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濟州牧使 |
영어음역 | Jeju Moksa |
영어의미역 | Jeju Magistrat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직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동전 |
[정의]
조선시대 제주목을 맡아 다스린 정3품 외직 문관.
[개설]
제주 목사는 형옥·소송의 처리, 부세의 징수, 군마(軍馬)의 고찰, 왜구의 방비 등 제주 지방에 대한 모든 행정을 집행하였던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한 관직이었다.
[제정 배경 및 목적]
제주도에 목사를 파견한 것은 고려 1295년(충렬왕 21)부터 간헐적으로 이루어져왔으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제주목의 설치는 1397년(태조 6)으로 나타난다.
이 당시 제주목은 제주도 전체를 관할 구역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끊임없는 중앙집권화 시책에 따라 1416년(태종 16)에 제주목 외에 대정현·정의현이 신설되면서, 제주목의 관할 구역은 제주읍성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약 31㎞, 서쪽으로는 약 32㎞, 남쪽으로는 약 27㎞ 이내에 해당하는 지역을 관할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제주 목사가 그 이전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었으며, 소관 지역을 관할하면서도 제주도의 전반적인 행정의 권한을 장악하고 있었다.
[담당 직무]
제주 목사는 행정적 기능 외에 군사적인 기능 수행이 항상 강조되어, 반드시 군사적인 직책이 겸임되었다. 군사적인 명칭의 변화에 따라 제주 목사는 조선 초기의 경우에는 주로 만호(萬戶)·안무사(按撫使)의 직책을 겸하였다.
또 1466년(세조 12)부터는 병마수군절제사라 하였고, 1638년(인조 16)에는 이를 고쳐 방어사(防禦使)라 했으며, 1642년(인조 20)에는 절제사(節制使), 1713년(숙종 39) 이후에는 다시 방어사란 직책이 겸임되었다. 이들은 명칭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 본질적으로 군직(軍職)의 겸임이라는 데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관등 체계상의 특징]
수령 행정 체계상 제주 목사가 대정현·정의현 지역을 순찰할 때에는 제주목에 관계된 사항은 제주 목사의 부관격인 판관이 대행하였다. 또 목사가 공사(公私)로 시간이 없을 때에는 판관이 대신하여 대정현·정의현의 업무를 감독하기도 하였다.
제주 목사는 소관 제주목 외에 대정 현감·정의 현감을 감독·규찰하였기 때문에 제주도의 책임자나 다름이 없었으며, 이런 까닭에 제주 목사의 동헌을 흔히 감영과 마찬가지로 영청(營廳)이라 불렀다.
[역대 역임자]
홍순만의 『제주 목사에 관한 서설』[1991]에 의하면 조선 시대[1392~1910년 기준] 제주 목사를 역임한 사람은 총 286명에 달한다. 이 수는 미부임자를 제외한 수이며, 평균 재임기간은 대력 1년 10개월 정도이다.
제주 목사 재임 기간 중에 6개월을 넘기지 못한 경우가 28명으로 9.7%, 1년을 넘기지 못한 목사가 65명으로 22%이었다. 재임 중에 사망한 사람이 21명으로 7%, 재임 중에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거나 파직된 경우가 68명으로 23%를 차지하였다.
가장 오래 제주 목사를 역임한 사람은 이경록(李景祿)으로 6년 5개월이나 재임하였다. 그리고 이종윤·조희순·백낙연·서병업 등이 임기를 넘긴 사례이다. 제주 목사 중에 선정을 베푼 목사는 58명으로 20%, 학정을 행한 목사는 14명으로 4.8%, 실정(失政)을 한 목사가 15명으로 5%로 나타난다.
[관련 기록]
청백리와 선정을 베푼 제주 목사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우선 기건 목사는 해녀들이 전복을 따는 모습이 너무 애처롭게 느껴져 제주 목사로 부임해 있는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약동 목사의 경우 세공(歲貢)을 감면하였고, 한라산신제를 산천단에서 행하게 함으로써 제주도민들이 산신제를 지내면서 동사(凍死)하는 폐단을 시정하였다. 더구나 그는 제주 목사를 그만두면서 제주에서 사용했던 모든 물건을 두고 갔으며, 그가 사용했던 말채찍은 관덕정에 오랫동안 걸려서 청백리의 상징으로 제주도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이종윤 목사는 일체의 선물 금지, 공물 및 부역 감소 등의 조치를 취하여 도민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이에 도민들은 그가 교체된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에 등장(等狀)을 올려 계속 유임되는 것을 허락받기도 하였다.
김수문 목사는 을묘왜변으로 제주를 침입해온 왜구를 막아냈으며, 노정(盧錠) 목사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기근과 전염병에 허덕이는 제주도민들을 위해 기민구제에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김정 목사는 삼천 서당을 창건하여 교육·문화 발전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몸소 돌을 나르면서 화북포구 축항 공사에 힘을 기울였다. 또 이원조 목사는 송죽사와 향현사를 건립하였다.
윤시동 목사는 보민고를 설치하여 굶어죽는 제주도민들을 구제하였고, 허명 목사는 수세(水稅)를 폐지하였으며, 윤구동 목사는 공피전과 공피창을 설치하고 환모조(還耗粗)를 비축하여 재해에 대비하였다.
[변천]
조정에서는 제주 목사를 기용하는 데 있어서 문·무관을 번갈아 임용하거나, 목사가 무관이면 부관격인 판관은 문관으로 임용함으로써 문·무의 조화를 이루어 행정을 담당해가도록 배려하였다.
이는 제주도가 지니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무관 수령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즉, 왜구들이 주요 약탈 대상지역인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제주가 위치하고 있어서, 왜구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본래 목사의 품계는 정3품에서도 당하관에 해당하는 통훈대부·어모장군이다. 그러나 제주 목사는 정3품에서도 당상관에 해당하는 통정대부·절충장군으로 주로 임명하였다.
그 이유는 제주 목사가 단지 제주목의 소관 업무만 담당한 것이 아니라, 제주도 전체를 총괄하는 기능과 제주 지역에 해당하는 전라도 관찰사 업무의 일부를 넘겨받아 집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목사보다 비중을 두고 임명하였던 것이다. 제주 목사 명칭 앞에 ‘행(行)’자가 붙어 행제주 목사(行濟州牧使)라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제주 목사를 비롯한 수령의 임기는 고려 시대의 경우 3년이 원칙이었으나, 조선 시대에는 왕대에 따라 임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즉, 조선 개국 초에는 30개월이었다가, 1423년(세종 5) 7월에 구임법(久任法)이 실시되면서 그 후 수령의 임기는 60개월[1,800일]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당상관 수령 및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지 못하는 지역의 수령 임기는 30개월(900일)이었다. 따라서 제주 목사나 정의현감·대정현감의 임기는 30개월이었다.
한편, 조선 시대에는 관리 임용에 엄격하게 상피제(相避制)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제주 출신이 제주 목사로 임명될 수 없었다. 제주 목사 재임자 중에 제주 출신이 없는 것은 그러한 연유이며, 제주판관이나 정의 현감·대정 현감의 경우는 예외적인 몇 사례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