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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제주인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11476
한자 在日濟州人
영어음역 Jaeiljejuin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동전

[정의]

본적지는 제주이나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거주하는 제주 사람.

[개설]

대판 지역을 중심으로 재일 제주인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을 전후하여 제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생활하면서부터이다. 일제강점기 제주인을 비롯한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 동기는 일제의 수탈 정책에 의해 토지를 잃거나 생활 기반을 상실한 농민들이 노동 시장에 취업하기 위한 이주였다.

1910년을 전후하여 일제의 제주 침탈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1910년대 세부 측량과 토지조사사업의 실시, 신작로 건설, 어업의 침탈 등으로 제주민들의 생활은 매우 곤궁해졌다.

이러한 가운데 1918년 제주에서는 일제의 침탈에 저항한 법정사 항일운동이 발생하여 더 이상 제주에서 삶을 지탱하기 어려운 제주도민들은 생활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 노동 시장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의 제1위의 공업 도시였던 대판은 제주도민에게 가장 중요한 노동 시장으로 등장하였다.

[변천]

1. 1920년대

1920년경부터는 제주인들의 공동생활이 시작되면서 제우회(濟友會) 등 상조 모임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제주인들은 주로 일본인들이 취직을 꺼리는 고무공장 등에 취직하였다.

1924년 당시 노임은 하루 20~45전(당시 담배 6전 정도)으로 노동 현실은 대단히 피폐하였다. 1925년을 전후하여 이꾸노구에는 다른 지역 출신의 한국인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제주인들은 이들로부터 ‘섬놈’이라는 이유로 멸시당하는 이중적 차별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대판 동부의 신흥 공업 지대는 1920년대 초와 1930년대 초 고무 공업이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그 발전을 지탱한 노동력은 한국인 중에서도 제주 지역 출신자들이었다.

제주인 노동자들은 일제 식민지라는 한계 속에서도 노동운동으로 이를 부분적으로 시정해 나가고자 하였다. 제주 지역 출신으로 1920년대 전반기에는 고순흠(高順欽), 1920년대 후반기에는 김문준(金文準)의 노동운동 활동이 활발하였다.

2. 1930년대

제판 항로(濟阪航路) 이용자가 가장 많았던 시기는 1930년을 전후한 시기이다. 왕복 항로 이용자의 평균은 연간 3만 2천여 명에 달하였다. 1934년 재일 제주인은 남자 29,360명, 여자 20,685명 등 총 50,045명으로 이때 재일 제주인이 가장 많이 도항한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제주도에 거주하던 제주도 남녀 인구와 비교할 때, 남자는 전체 제주 인구의 1/3에 해당하며 여자는 1/5에 해당한다. 특히 당시 재일 제주인 중에서 여성의 연령 구성비를 보면, 15세 이하(17.3%), 16~20세(16.8%), 21~25세(17.0%), 26~30세(18.5%), 31~35세(12.9%), 36~40세(8.8%), 41~50세(5.5%), 51세 이상(3.1%)으로 나타난다.

16세에서 30세에 해당하는 여자들이 52.3%로 절반을 상회한다. 이는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 혹은 결혼해서 얼마 되지 않은 부부들이 주로 이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여성들은 주로 방직공으로 활동하였다.

이주 초기 대판 지역에 이쿠노구를 가로지르는 평야운하 개설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따라서 운하 건설 공사에 제주 출신을 비롯한 한국인 노동자가 많이 참여하였으며 특히 제주 출신들 가운데는 노동자를 수용하는 식당을 경영했던 사람이 많았다. 1930년대 노동운동가로는 조몽구(趙夢九)·현상호(玄尙好)·현호경(玄好景) 등이 이름난 제주 지역 출신 활동가들이었다.

3. 1940~해방 전(강제 동원 시기)

1940년대 초는 일본의 전시 체제 기간으로 1938년 제정된 「국가총동원법」과 「노동관계칙령」, 그리고 1939년 제정된 ‘국민직업 능력신고’, ‘국민징용령’ 등으로 노동력 징발을 위한 징용과 군 요원으로 차출하기 위한 징병이 강요되었다. 즉, 일본은 침략 전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한국의 청장년층들을 징용과 징병으로 동원한 것이었다.

1939년 재일 제주인은 45,900여 명에서 1945년 해방 당시 10만여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1940년에서 1945년 사이 배 이상의 재일 제주인이 증가한 사실에서 당시 일본으로부터 대규모 인구 유입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4. 해방 후~1960년(밀항 도입기)

해방으로 많은 재일 제주인들은 제주도로 귀환하였으나 제주도에 들어와도 뚜렷한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 그대로 정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더구나, 1946년 제주도에 만연했던 감염병 및 불안한 국내 치안은 선뜻 고향으로의 발길을 재촉할 수 없게 하였다. 대판 전체적으로 볼 때는 70~75% 정도의 재일 한국인들이 귀환하였지만 제주 사람들이 밀집해서 살았던 이쿠노구에서는 60% 정도의 사람들만이 귀환하였다.

1947년 3·1시위사건에서 도화선이 된 제주 4·3으로 제주의 청년들에 대한 강력한 경찰의 탄압이 이루어졌고 이에 연루된 제주인들 중에는 경찰의 강력한 검거를 피하여 일본으로 건너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제주 4·3을 전후한 시기에 대략 5천~1만 명의 제주인이 일본으로 밀항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59~1961년 북한의 북송사업은 재일 제주인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제주 4·3으로 도일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북조선으로 건너가는 등 재일 제주인 사회 또한 이념적으로 양분되는 현상을 보였다.

5. 1961~1970년대(밀항 절정기)

박정희 군사 정권 시기로 대표되는 이 시기는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교류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재일 제주인들은 재일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법적 지위 면에서 남한에 귀속된 국적을 갖고 영주 외국인으로 거주하거나 아니면 북조선의 공민으로서 국제적 피난민의 신분으로 거주하는 상황이 야기되었다.

1961~1970년대는 일본의 고도 성장기로 1920년대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이 매우 부족한 시기였다. 따라서 제주도에서 경제적으로 곤란을 당한 사람이나 사업 실패, 가계 파탄 등으로 빚을 지게 된 사람들도 일본을 피난처 삼아 밀항하기도 하였다. 1971년 12월 말 기준 재일 제주인은 86,490명으로 전체 재일 한국인의 14.1%를 차지하였다.

이 시기 제주인들은 정부에 의해서 가공된 재일 제주인 정보로 인하여 심한 정신적 피해를 보기도 하였다. 생전에 한번 보지도 못한 삼촌이나 먼 친척이 북송선을 탔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빨갱이’로 몰리는 일이 빈번하였다. 부득이한 연유로 일본을 다녀오게 되더라도 중앙 정부로부터 사찰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6. 1980~현재(불법 체류기)

1980년대에는 해외여행의 자유화로 공식적인 단기 방문 비자를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체류 기간이 지난 체 불법적으로 취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증가하였다. 일본 학자들은 이들을 ‘뉴카마(new-comer)’라고 부르며 재일 제주인들은 ‘비행기부대’라고 부른다.

혹은 일제강점기부터 거주한 1세와 구분하여 밀항 세대를 ‘신1세대’, 지금의 불법 체류자를 ‘신신1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 중에는 국내에서 불법을 행한 자들이 간혹 있어서 그 이전 세대와는 달리 재일 제주인 사회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한다. 여행 자유화로 친척 방문 비자로 6개월씩 단기로 체류하여 임시 노동자로 일하면서 목돈을 마련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

[재일도민회]

일제강점기 제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처음에는 개별적인 삶을 영위하였으나 점차 저사야(猪飼野)[이쿠노구의 옛 이름으로 돼지를 키우는 들판이란 의미임] 지역에 모여 살면서 ‘제우회(濟友會)’ 등의 상조회를 만들기 시작한다.

서로 간에 유대를 강화하기 위하여 다른 지역 출신 재일 한국인들이 도 단위 혹은 시군 단위의 조직을 만들고 있는 반면 제주 출신자들은 마을 단위의 단체를 조직하였다.

재일 제주인들은 일본이라는 이국에서의 어려운 생활환경을 극복하기 위하여 상호부조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마을 단위로 한 다양한 친목회를 조직하였다. 김녕·함덕·애월·법환 등 각 마을 단위 친목회는 1920년대 이후 계속해서 조직·운영되고 있다.

[현황]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 제주인은 약 12~15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좀 오래된 통계이기는 하지만 1993년 통계에 의해서 추정한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에 외국인 등록을 마친 재일 제주인(한국과 조선 국적 소유자에 국한한 것임)은 117,513명이었다. 여기에 등록을 하지 않은 자와 귀화자를 포함하면 재일 제주인은 15만 명을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재일 제주인들은 동경을 중심으로 한 관동 지방과 대판을 중심으로 한 관서 지역에만 전체의 94%에 해당하는 110,556명이 거주한다. 관서 지역에는 재일 제주인 전체의 69%에 해당하는 81,000여 명이 거주하는데 그중 대판부에 71,677명이 밀집되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대판의 이쿠노구[生野區]는 제주 출신들이 밀집해서 생활하고 있는 곳으로 ‘일본 속의 제주’라 일컬어진다. 쯔르하시[鶴橋]에는 ‘국제시장’ 또는 ‘Korea Town’이라 불리는 한국인 상가가 있다.

재일 한국인들은 ‘아리랑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제주 출신들에게 수많은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제주인들은 타고난 저력으로 역경을 딛고 일어나 지금의 재일 제주인 사회를 형성해 오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03.17 내용 수정(현행화) [변천] 4. 해방 후~1960년(밀항 도입기) 전염병 및 → 감염병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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