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6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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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元鎭 |
영어음역 | Yi Wonjin |
이칭/별칭 | 승경(昇卿),태호(太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정의]
조선 중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여주. 자는 승경(昇卿), 호는 태호(太湖). 아버지는 형조판서 이지완(李志完)[1575~1617]이다.
[활동사항]
1615년(광해군 7) 생원으로서 대북의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영의정 이원익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 후에 풀려났다. 1630년(인조 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지평·교리·부수찬·장령·집의 등을 거쳐 1647년(인조 25) 승지에 올랐다.
1651년(효종 2) 7월 김수익(金壽翼)의 후임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시절 남만인(南蠻人) 30여 명이 제주에 표류해 오자 이들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군기를 수리하고 병사 훈련 장소를 마련하여 세병헌(洗兵軒)이라 하는 현판을 걸었다.1652년(효종 3) 봄에 차귀진(遮歸鎭)[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을 설치하여 군대를 주둔시켰다.
1653년(효종 4) 봄 대정항교를 이설하였다. 대정향교는 본래 대정성 안에 있었으나 제주안핵어사 이경억(李慶億)이 부지가 낮고 습기가 차며 비좁다고 이설을 제의한 바 있었는데, 현재 단산 밑에 있는 대정향교는 이원진이 이설한 향교이다.
1653년 8월에는 네덜란드 사람 하멜 등 일행 36명이 가파도 근처에서 파선되어 대정현에 표류하자 서울로 압송하였으며, 제주성의 북수문 위에 공진정(拱辰亭)을 창건하였다.
1653년(효종 4) 가을, 큰 풍수해로 제주성의 남수구와 북수구, 홍문이 무너지자 수리 작업을 시작하여 1654년(효종 5) 봄에 복원을 완료하였다. 1653년(효종 4) 10월에 떠났다.
[학문과 사상]
안재순의 「반계 유형원의 실학사상」(『사상』봄호, 사회과학원, 1997)을 보면 “반계는 이원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성호 이익이 언급하였다. 이원진은 반계의 외숙이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원진은 실학의 개척자라고 볼 수 있다.
[저술 및 작품]
『탐라지(耽羅志)』가 있는데, 1653년(효종 4)에 편찬된 제주목·정의현·대정현의 읍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