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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368
한자 烈女
영어음역 yeollyeo
영어의미역 virtuous woman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동전

[정의]

제주 지역에서 조선시대에 정절을 지켰던 여자.

[개설]

유교에서 중요시한 덕목 가운데에는 효(孝)와 열(烈)이 있는데, 효는 자식이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이며 열은 아내가 남편을 잘 섬기는 것이다.

[열녀의 역사적 배경]

조선조에 태조가 즉위하면서 그 해 7월에 발표된 「즉위 교서」에는 충신, 효자, 의부, 절부의 일은 풍속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이를 널리 권장하고 문려(門閭: 동네 어귀에 세운 문)를 세워 정표로 삼도록 하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여성들의 생활상은 서서히 규제당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유교적 의미에서 여성이 지켜야 할 최우선 덕목은 정절로 설정되었다.

또한 효자·충신·열녀를 배출한 가문에 정문(旌門), 즉 붉은색 문을 세워 그 행적을 표창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요역을 면제하는 복호(復戶)를 하도록 하였다. 성종대에 양반층 여성에 국한된 여성의 재가 금지는 점차 일반 평민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성종대 사림 세력의 중앙 진출과 중종대의 향약 보급 운동 등으로 향촌 사회에 유교적인 이데올로기도 확대, 보급되었다. 이에 따라 유교 풍속 교화를 위해 『소학』, 『열녀전』, 『여계』, 『여칙』 등의 유교 윤리 서적이 보급되었다. 조선 후기 가부장제의 강화로 인해 여성들은 더욱 열녀가 되기를 강요당했다.

[조선 시대 제주의 열녀]

조선 시대 제주의 열녀로 인정받은 사람은 30여 명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천덕(千德)은 제주목 곽지리에 거주하던 공노비였다. 그녀는 남편이 죽자,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냈고, 3년이 지나서도 삭망제를 행하였다. 관아에서 곤장으로 위협하고, 부친을 설득하여 이권으로 유인하였으나 평생 수절하였다.

국지(國只)는 제주목 신촌리에 거주하던 사노비였다. 남편을 잃자, 사람들이 그녀의 미모를 탐낸 나머지 권세를 내세워 겁탈하려 하자 재산을 버리고 남편의 일가집으로 거처를 옮겨 평생 수절하였다.

유진(有眞)은 제주목 곽지리에 거주하던 공노비였다. 남편이 죽고 나서 어머니가 다른 곳으로 재가시키려 하자, 남편 무덤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오씨(吳氏)는 김창백의 아내로서, 제주목 어도리 출신의 양반이었다. 남편이 죽자 스스로 목을 매어 남편과 함께 무덤에 매장되었다.

박씨(朴氏)는 제주목 엄장리에 거주하던 양반이었다. 남편이 사망하자, 평생 수절하며 남편의 무덤에 물을 뿌리고, 비로 쓰는 등 정성이 지극하였다. 남편은 이항춘으로, 효자 박계곤의 딸이다.

고소락(高所樂)은 제주목 엄장리 사람으로, 열녀 박씨의 사비로 주인의 정절에 감탄하여 평생 혼인하지 않고 주인을 섬겼다.

주씨(周氏)는 제주목 저지리 사람으로 남편이 죽자 정성을 다하고 장례를 지낸 후, 자식들을 언니에게 부탁하고 목매어 자살하였다. 남편은 방군 고거상이다.

홍조이(洪召吏)는 제주목 엄장리에 거주하던 중인이었다. 제주목 노형리 향리 홍인효의 딸로 남편의 병을 정성껏 간호했으나 끝내 가망이 없자 남편이 사망하기 2일 전에 자결하였다. 남편은 김창욱이다.

부가(夫哥)의 처는 정의현 의귀리 사람이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뒤 제주목의 비장이 그를 탐하려 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도끼로 자신의 손을 베고 크게 토옥하다 죽었다고 한다.

김씨(金氏)는 대정현 창천리에 살던 양반이었다. 유생 강응주의 아내로서 남편이 죽은 뒤, 시어머니의 병 때문에 차마 따라 죽지 못하다가, 시어머니가 사망하자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하였다.

박조이(朴召吏)는 제주목에 살던 중인이었다. 주리 손처권의 처로 남편이 갑작스레 병을 얻어 사망하자, 처마에 목을 매어 죽어 남편과 같은 무덤에 묻혔다.

양씨(梁氏)는 대정현 상예래리 사람으로 남편의 병이 위급하자 목을 매어 죽었다.

오조이(吳召吏)는 정의현 사람으로 남편의 병이 위중하여 끝내 남편이 사망하자 남편을 따라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천향(千香)은 정의현에 살던 교노비로서, 정의 향교의 노비이던 남편이 죽자, 머리를 자르고 남편을 따라 죽었다.

오씨(吳氏)는 정의현 의귀리 사람으로, 남편 김창언이 죽자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양씨(梁氏)는 제주목 아라호리에 살던 양반이었다. 유생 전형원의 처로 남편의 병을 정성으로 돌봤으나 사망하자, 단식을 하다가 남편을 따라 죽어 남편과 함께 매장되었다.

김씨(金氏)는 제주목 아라리에 살던 양반이었다. 오융복의 처로 남편이 죽자, 어린 자식을 노비에게 맡기고 따라 죽었다.

김씨(金氏)는 대정현 중문리에 살던 양반이었다. 유생 김창은의 처로 남편이 위독하여 끝내 사망하자 장례식 날에 목을 매어 남편의 뒤를 따랐다.

부씨(夫氏)는 정의현 고성리에 살던 양반이었다. 유생 오극지의 처로서 남편이 사망하자 장례를 마친 후 목을 매어 죽었다.

정매(貞梅)는 정의현 법환리 사람으로 변종원의 처이다. 남편이 사망하자 목을 매어 자살한 뒤 남편과 같이 매장되었다.

김씨(金氏)는 정의현 위미리 사람으로 김광빈의 처였다. 남편이 죽자 남편을 따라 목을 매어 같이 매장되었다.

이씨(李氏)는 대정현 하예래리 사람으로 강응록의 처였다. 결혼 1년 만에 남편이 병을 얻어 죽자 음식을 먹지 않고 남편을 따라 죽었다.

문조이(文召吏)는 제주목 건입리 사람으로 송덕보의 처였다. 결혼 4년 만에 남편이 출륙하여 행방불명이 되자, 바다 고기를 안 먹는 등 단식을 하다 사망하였다.

옥매(玉梅)는 제주목에 살던 공노비였다.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남편을 잃고, 평생 수절하면서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남편은 과노 유제기이다.

양씨(梁氏)는 제주목 고성리 사람으로 조계상의 처였다. 남편이 병을 얻자, 남편을 살리려면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무당의 말을 믿고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다음날 남편도 사망하였다.

홍성(洪姓)은 조취승의 처였다. 1834년 전염병으로 남편을 잃고, 두 아들까지 천연두로 잃자 짠 간장을 먹고 죽었다.

김씨(金氏)는 제주목 오라리 사람으로 양일복의 처였다. 남편이 사망하자 뒤를 따라 죽으려 했으나 시부모가 위로하면서 말리자 열달 뒤에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양씨(梁氏)는 제주목 매촌 사람으로 변지환의 처였다. 남편이 죽은 후 남자들이 여색을 탐하자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고씨(高氏) 제주목 북촌리 사람으로 김여빈의 처였다. 남편이 상업을 하다가 의주에서 배가 침몰하여 사망하자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가서 시신을 운반해 왔다. 그 후 1864년(고종 1) 제주목사 양헌수가 고기와 쌀을 하사하였다.

고씨(高氏)는 대정현 용수리 사람으로 강사철의 처였다. 남편이 고기 잡이를 나갔다가 표류하여 돌아오지 않자 남편을 기다리며 울다가 바닷가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다. 제주판관 시재호가 절부암이라 이름 지은 곳에서 마을 주민들로 하여금 1년에 한 차례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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