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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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先史遺物遺蹟 |
영어음역 | seonsa yumul yujeok |
영어의미역 | relics and remains of prehistoric time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선사/선사 |
집필자 | 강창화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발견된 역사 기록이 존재하지 않은 시대의 유적과 유물.
[개설]
제주도는 섬 자체가 지닌 고립성과 전통성 즉, 문화적 잔존성으로 인해 독특한 문화의 흐름이 있다. 제주도의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는 한반도의 일반적인 틀을 따르는 것이 합당하다.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는 그 전개 과정이 한반도에 후행하거나 유물군이 혼합되어 나타나므로 무문 토기 시대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제주도의 구석기시대는 하나의 섬이 아닌 한반도 전체와 연륙된 대륙이었다. 이 시기는 홍적세가 끝나는 1만2,000 B.P.까지로 설정할 수 있다.
제주도의 신석기시대는 편년의 근간이 되는 유물로 보아, 한반도 남부 지방의 신석기 토기 흐름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그 축을 같이 한다. 다만, 양 지역에서 보이는 큰 차이점은 제주도에서는 전형적인 빗살 무늬 토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한반도에서는 1만년 전을 중심 연대로 하는 고산리식 토기 단계가 없는 점이다.
제주도의 무문 토기 시대는 한반도의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를 말하며 기원을 전후한 시기를 하한으로 설정할 수 있다. 육지부에서 확인되는 무문 토기 문화가 제주도에 그대로 유입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기적으로 다소 후행하지만 같은 문화 단계로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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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주 선사시대 시기 구분과 정치·사회적 변천
[구석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
제주도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보고된 것은 북제주군 애월읍 어음리 빌레못 동굴 유적과 서귀포시 천지연 유적이 있다. 빌레못 동굴 유적은 동굴 입구 집자리이고 천지연 유적은 바위 그늘 집자리이다. 이 유적은 구석기시대 중기와 후기로 추정된다.
빌레못 동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동물 화석과 석기류가 있다. 동물 화석은 2목 2과 3속 3종이며, 큰 곰(Ursus arctos)·큰 사슴(Cervus elaphus)·노루(Capreolus capreolus)가 알려져 있다.
이 동물 화석 중 황곰은 마지막 빙하 기간 동안에 제주도와 한반도와의 연륙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사슴은 유럽의 예를 들어 후기 홍적세에 번성했다고 언급되고 있다. 이 사슴은 치아 2개와 관절골 1개에 대한 분석 결과 대륙록(大陸鹿, Cervus nippon)으로 분류되며 인공흔이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사슴은 우리나라에서도 중기 홍적세(10만년 전-1만년 전) 유적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는 동물종이다.
석기류는 대형 석기와 박편 석기로 구분된다. 대형 석기는 뾰족 찍개 3점·박편 도끼 4점이며, 박편 석기는 긁개 26개·칼 12개·첨기 2개·송곳 1개·부리형 석기 1개·홈날 2개·톱니날 1개가 확인되었다.
이 외에 박편 49개·돌날 2개·돌핵 2개가 함께 수집되었다. 석기류는 총 105점이 발견되었으며, 층위로 보면, 1문화층에서 71점, 2문화층에서 34점이 수집되었다.
천지연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1975년에 서귀포시 천지연 폭포 근처에서 현무암으로 된 긁개 1개·돌날 3개·박편 2개·홈날 석기 1개 등 모두 7점이 발견되었다. 1976년과 1977년에는 지표에서 첨기 1개·돌날 4개·박편 4개 등이 채집되었다.
제주 지방의 구석기에 대한 논의가 부족한 상태에서 빌레못 동굴 유적과 천지연 유적의 성격 규명은 매우 중요하다. 빌레못 동굴 유적의 형성 과정, 석기의 상세한 분류, 암질 분석뿐만 아니라, 황곰뼈 화석에 대한 정확한 감정 및 분류가 요구된다. 천지연 유적도 석기 유물의 조합상, 정확한 출토 상황 등의 보고가 요구된다.
제주도 구석기시대를 보면, 50만년 전에서 30만년 전까지 제주도 화산이 최성기였으며, 중기 구석기에서 후기로 이어지는 시기인 10만년에서 2만5천년에 기생 화산군이 도 전역에 걸쳐 만들어졌다. 이러한 구석기 시대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제주도에서 30만년 전 이전의 전기 구석기 유물이 존재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또한 10만년 이후에도 계속되는 지질·지형 변화로 인해 제주도의 대지는 당시 수렵인들에게는 다른 곳보다 불리한 생존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주도에서 중기 구석기 유적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도 극히 짧은 기간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안정된 지반이 형성된 2만5천년 이후의 제주도는 사람이 살기에 적당했을 것이다. 그 예로 전환기에 속하는 고산리 유적은 홍적세(Pleistocene)에서 충적세(Holocene)로 변화하는 자연 환경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후기 구석기시대 인류의 제주도 점거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도 무리 없을 것이다.
[신석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
제주 신석기 시대 문화의 연구는 제주 고산리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고산리 신석기 문화는 아직까지 한반도에서는 찾을 수 없다. 이에 고산리식 토기의 유입과 사용 시기는 시베리아 아무르강 중·하류 오시포프카 문화(Osipovka cluture)와 일본 열도의 죠몬[繩文] 초창기 유물 조합상과의 비교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그 시기는 아무르강 유역의 오시포프카 문화 3단계에 해당하는 11,000~9,000 B.P.로 설정할 수 있다.
그 다음 시기로 이어지는 조기의 융기문 토기 단계는 고산리식 토기와의 공반 관계가 형성되지 않아 고산리 문화의 종말기와 맞물리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삼양동에서 융기문 토기와 함께 양면 박리의 첨두기와 석편이 출토되고 있어 융기문 토기의 상한 연대가 소급될 가능성과 고산리식 토기의 하한 연대가 내려올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전기의 압인문 토기 단계는 아직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확실한 시기 설정이 어렵다. 이 단계의 토기로는 온평리와 고산리 동굴 출토 압인횡주어골문(押印橫走魚骨文) 토기와 고산리 출토 '之'자문 토기 등이 있다. 전자는 남부 지방의 영선동식 토기 단계로 보이며, 후자는 동북 지방의 연속압날지자문 토기 계통으로 파악된다.
중기의 전형적인 태선침선문(太線沈線文) 토기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화산섬이 만들어낸 수렵과 채집 및 어로 행위에 적합한 풍부한 생계 조건에서 애써 농경을 택할 이유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농경과 연관된 전형적인 태선침선문 토기는 사용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를 공백기라고 단언하는 것은 아니다. 섬이 갖는 문화의 전통성·잔존성·독특성으로 인해 조기 또는 전기 토기가 지속되거나 후행할 가능성과 후기의 봉계리식 토기 단계가 선행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하지는 못한다.
후기의 봉계리식 토기 단계는 성읍리 야외 생활 유적과 북촌리 암음 주거 유적을 표지 유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성읍리 유적에서 출토되는 다양한 압날 기법의 단순·복합 문양은 전형적인 봉계리식 토기 전통을 갖고 있으며, 남부 지방 후기 토기군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러한 온평리 압날문 토기는 압날점렬문과 퇴화침선문 토기를 표지로 하는 북촌리식 토기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북촌리식 토기는 특정 문양의 선호·조흔 수법·거치상의 침선 수법 등 봉계리식 토기 전통을 바탕으로 제주도에서 자체적으로 제작되었다. 특히, 삼각형 문양과 같은 독자적인 문양 형태를 발전시켜 재지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만기의 이중구연 토기 단계는 북촌리 바위 그늘 최하층(Ⅴ층)을 표지로 한다. Ⅴ층에서 채집한 전복패시료의 C14 연대가 2,920±25 B.P.로 나와 있어 이 연대를 하한 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이 토기가 출토되는 유적들은 해안 사구층 하단 또는 해안 인근 평탄 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이 시기에 와서 본격적인 패총이 만들어지며 해안을 중심으로 한 인구 확산과 안정된 생계 패턴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이중구연 토기와 함께 직립구연의 심발형 무문양 토기가 일부 공반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의 무문 토기로 이어지는 자체 토기의 발전 가능성도 제시해 볼 수 있다.
[무문 토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
제주도 무문 토기 시대 문화의 형성은 상모리 유적과 김녕리 패총 유적으로 보인다. 두 유적의 집단은 모두 농경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그 시기의 선후 관계 판단은 쉽지 않다.
상모리 토기 문화는 농경을 기반으로 한 흔암리 유형의 토기 문화가 제주에 정착하면서 어로를 중심으로 한 수렵 채집 중심의 생계 유형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김녕리 패총은 역삼동 유형의 토기 문화로 농경을 기반으로 한 집단으로 추정된다.
대포동 유적에서는 송국리형 토기 1점과 유병식 석검이 확인된다. 송국리형 토기는 변화형으로서 전남 지역과 남해안 지방에서 흔히 보이는 것이다. 이는 적어도 송국리 유형의 문화가 초기 철기시대로 여겨지는 제주 삼양동 유적의 송국리형 주거지 단계 이전에 제주에 거점을 확보했음을 보여준다.
후기의 토기군은 공렬 토기의 퇴화형으로 알려진 여러 토기들이 있다. 골아가리 토기·공렬 토기·공렬+골아가리 토기·마연 토기·직립구연 토기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은 용담동 일대 유적·강정동 유적·곽지 패총·북촌리 유적·삼양동 일대 유적 등으로 적은 수량이긴 하지만 넓은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다.
이 유적들은 흔암리 유형이 쇠퇴되는 단계의 토기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별개의 단계로 여겨지고 있다. 더욱이 이들 유적의 토기가 모두 흔암리 유형이 퇴화된 형태인지는 좀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동명리 유적, 제주 삼양동 유적 Ⅱ지구 5·6호 주거지, 월성로 유적에서 무문 토기 시대 종말기적 양상을 볼 수 있다. 후기의 무문 토기 유적인 곽지 패총, 제주 삼양동 유적에서는 다음 시기에 나타나는 점토대 토기가 일부 공반되어 두 문화가 상호 접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주도 무문 토기 시대 단계의 유적들은 대부분 주거지와 무덤 등으로 확인된다. 이로써 제주도 내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추정 할 수 있다.
후기의 유적군은 공반 유물상을 통해 어느 정도 시기 차를 둘 수 있다. 강정동 유적은 전형적인 골아가리 호형 토기로 볼 때 비교적 이른 시기의 유적으로 판단된다. 용담동 유적·북촌리 유적·동명리 유적·곽지 패총·월성로 유적은 무문 토기 종말기를 알려 주는 유적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판단의 기준은 순수 공렬 토기계의 존재, 점토대 토기의 공반 관계, 직립구연 토기 출현과의 관련 여부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동시기의 문화적 복합 양상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며, 집단의 이해 관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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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무문 토기 시대 상모리식 토기의 변화와 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