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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029
한자 三別抄
영어음역 Sambyeolcho
영어의미역 Three Elite Patrol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일우

[정의]

제주 지역을 항몽의 최후 거점으로 삼았던 고려 무신정권 때의 특수 부대.

[삼별초의 제주에서의 활동사항]

1. 송담천 전투

삼별초는 무신 정권의 무력적 보위 기구이자, 40여 년 지속된 대몽 항쟁의 핵심 부대였다. 이들은 원에 굴복하여 강화를 맺은 정부에 반기를 들어 1270년(원종 11) 진도를 거점으로 새 정부를 세웠다.

삼별초는 진도에 거점을 정한지 3개월 후인 1270년 11월 이문경(李文京) 부대를 제주로 보냈다. 이들은 명월포(明月浦)를 통해 상륙한 뒤, 제주 동쪽 동제원(東濟院)[현 제주시 화북1동 거로마을 입구] 일대에 주둔하였다.

이문경 부대는 삼별초 진입을 막기 위해 개경 정부가 보내 제주를 지키며 성 축조 등의 방어 시설을 설치하던 관군을 역습해 송담천(松淡川) 전투에서 물리치고, 조천포(朝天浦)에 거점을 확보하였다. 삼별초 정부가 수립된 지 1년 만에 진도가 여·원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자, 진도를 탈출한 삼별초의 잔여 세력은 제주로 진입하였다.

2. 삼별초와 제주민

김태현묘지명(金台鉉墓誌銘)에는 송담천 전투에서 ‘수토자(守土者)’가 ‘수서(首鼠)’하여 개경 정부의 관군을 돕는데 힘을 다하지 않았고, 또한 ‘토인(土人)’이 삼별초를 ‘자(資)’했기 때문에 이문경 부대가 개경 정부의 관군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이때의 ‘토인’은 물론이고, ‘수토자’도 제주 사람들이었다. 즉, ‘수토자’는 개경 정부의 관군 통제 하에 삼별초 진입의 방어와 그 시설 설치에 나섰던 제주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제주 사람들 가운데 ‘수토자’가 취했던 ‘수서’라는 행동은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가에 대해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를 일컫는다. 즉, ‘수서’는 쥐가 의심하여 구멍에서 과감히 나오지 못함을 비유하는 것으로, 어느 쪽 편에 설 것인가를 결정짓지 못해 양다리를 걸치는 상태를 일컫는 것이다.

한편, ‘토인’은 이문경 부대가 제주의 서쪽 명월포에 도착한 뒤, 동쪽의 화북동 지역으로 진군해 가는 과정에서 자발적, 혹은 강압과 회유로 삼별초에 동조했던 제주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취한 ‘자’라는 행동은 삼별초를 화북동 지역으로 안내하는 일, 더 나아가 삼별초 편에 서서 관군과의 전투에 참여했음을 뜻한다. 즉, 개경 정부와 삼별초가 제주 장악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일 때 대부분의 제주 사람들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게 되었다”는 심정이었다.

이에 따라 제주사람들은 경계 어린 행동으로 개경 정부와 삼별초군 사이에서 관망하거나 중립적 자세를 취하였고, 일부 사람들은 삼별초군에 좀더 호의적 행동을 취하였다.

3. 항몽 거점으로서의 제주

대몽 항쟁이 전개되는 동안 제주는 진도의 삼별초 정부가 세워지기 훨씬 이전부터 항몽의 거점으로 삼을 만한 지역으로 주목되어 왔었다. 무신 정권 말기에는 무신 집정자가 출륙 환도를 기피해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한편, 항몽전을 계속 전개할 목적으로 강화도를 버리고 개경에서 더 멀리 떨어진 다른 섬으로 정부를 옮기려고 하였는데, 이때 주목되었던 지역이 제주였다.

무신 집정자는 세 차례나 정부를 제주로 옮기려는 시도를 하였고, 이의 사전 작업 임무를 띤 수령도 파견했던 것 같다. 여기에는 무신 집정자가 남송(南宋)과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의 요지였던 제주에 근거지를 잡은 뒤, 이들 양국과 더불어 항몽 연합 전선을 형성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 점은 삼별초가 반기를 들어 남하할 때, 근거지로 삼을 지역으로서 제주와 진도를 오랫동안 저울질하다가 진도를 먼저 택했고, 여기에서 이들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 항몽 연합 전선을 꾀하고자 했던 사실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삼별초 정부가 진도에 자리 잡은 뒤, 제주 지역을 배후 거점으로 확보하고 진도 함락 뒤에는 제주를 최후의 항몽 거점으로 삼았던 것은 어쩔 수 없었거나 우연한 일이 아니라 이미 계획되었던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진도 함락 이전부터 제주는 이미 삼별초 정부의 영향력 하에 놓여져 있었고, 진도 함락 이후에는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하에 진도를 탈출한 삼별초의 잔여 세력이 들어왔다. 이로부터 약 31개월 동안 제주는 최후까지 항몽 활동을 벌였던 삼별초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제주 삼별초는 약 1년 동안 방어 시설 설치에 주력한 뒤, 1272년(원종 13)부터 군사 활동에 나서 점차적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나아갔다. 그러나 제주 삼별초의 군사 활동은 조운로의 차단, 개경 정부에 대한 무력 과시, 필요한 인적 자원의 납치 등과 같은 산발적 위협 공격에 머물고 있어 진도 거점 시기와는 달리 그 기세가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남해도를 근거지로 삼고 있던 유존혁(劉存奕)도 진도 삼별초군의 제주 진입 소식을 듣자 80척의 선단을 이끌고 관군에 합류하였다.

4. 최후의 결전

제주에서 삼별초의 군사 활동이 활발해지자, 우선 고려와 원은 사신과 삼별초 지휘부의 친척 등을 보내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제주 삼별초는 개경 정부의 회유를 강력하게 거부하였다.

그러자 원은 조공(朝貢) 여부가 불투명한 일본보다는 제주 삼별초를 먼저 평정하는 것이 일의 순서상 옳다는 결정을 내렸으며, 개경 정부도 원에 삼별초의 무력 토벌을 요청하였다.

1273년(원종 14) 개경 정부의 김방경(金方慶)과 몽골의 홍다구가 여·원연합군 약 12,000명을 이끌고 제주에 들어와 육지부에서 출동한 지 20여 일 만에 삼별초군의 항파두리성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3년여 동안 이어진 제주 삼별초의 항몽 활동은 종식되고 말았다.

[삼별초의 대몽 항전 실패]

1. 탐라총관부

제주 삼별초가 평정되자, 몽골은 원의 군사 500명을 주둔시키고,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제주를 원의 직할령으로 삼았다. 몽골은 제주가 일본과 남송을 잇는 바닷길의 요충지였기에 양국 정벌의 전초 기지로서 활용코자 일찍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원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삼별초를 제주에서 평정한 것을 직접적 계기로 삼아 이곳을 직할령화 하였던 것이다.

2. 이중귀속

1294년(충렬왕 20)에 이르러 고려는 원에 제주 반환을 요구하여 제주의 지배권을 돌려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원이 제주에 설치한 목마장이 원의 14개 국립 목장 중 하나로 간주될 만큼 번성하였다.

또한 다수의 몽골족이 제주에 정착하여 우월한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유지해 감에 따라 몽골족의 제주 경영은 계속 되었다. 결국 삼별초의 대몽항쟁 이후 100여 년 간 제주는 고려와 몽골에 이중으로 귀속되어 양국의 정치적 간섭을 동시에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3. 정치 세력 관계

제주 삼별초 대몽 항전의 실패는 정치 세력 측면에서 반몽적 정치 세력의 일소와 친원 세력의 득세라는 결과를, 대외 관계 면에서는 국가의 자주성이 크게 손상될 정도로 몽골이 고려 내정에 깊이 간여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제주에서의 삼별초 유적]

삼별초는 제주에 들어와 우선 방어 시설을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방어 시설로서는 항파두리성·애월목성·환해장성 등을 들 수 있다. 항파두리성은 제주의 삼별초 지휘부가 들어섰던 곳으로 항몽의 최고 주요 거점이었다.

애월목성은 삼별초가 애월포에 나무로 쌓은 목성인데, 아마도 애월포가 삼별초 수군 병력의 거점이자 항파두리성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관문의 하나였기 때문에 방어 시설을 쌓았을 것이다.

환해장성은 제주 해안을 전체적으로 둘러친 3백리 장성인데, 처음에는 삼별초의 진도 거점 시기에 개경 정부에서 보낸 관군이 삼별초의 진입을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어 삼별초가 개경 정부군과 몽골군의 공격에 대비해 계속해서 환해장성을 쌓았는데, 조선 시대에도 계속 보수 작업이 행해졌던 것 같다. 제주 삼별초의 방어 시설은 내성·중성·외성의 3중성으로 둘러쳐 진도의 용장산성보다 훨씬 강화된 느낌을 준다. 이것은 삼별초가 진도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 제주의 방어 시설 설치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축성 작업에 동원된 제주민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례로, 김통정 장군이 토성을 쌓을 때는 매우 흉년이었는데, 역군들이 배가 고파 쭈그려 앉아 똥을 싸고, 돌아앉아 그것을 먹으려고 보면, 이미 옆에 있던 역군이 주어먹어 버려 제 똥도 제대로 먹지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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