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956 |
---|---|
한자 | 佛敎文化遺蹟 |
영어음역 | Bulgyo munhwa yujeok |
영어의미역 | Buddhist Archaeological site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한금실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분포되어 있는 불교에 관련된 유적지.
[개설]
제주도의 불교 유적지는 근대 이전의 유적지만 약 85개소가 확인되었으나,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제주목에 사찰이 총 15개소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1653년 이원진의 『탐라지(耽羅志)』에도 총 22개의 사찰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조사 작업이 이루어진 고려 시대 사찰은 수정사, 법화사, 원당사 등에 불과하다.
고려 시대에 이미 정착기에 들어섰던 제주 불교가 이처럼 황폐화되어 오늘날까지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조선 시대의 배불 정책으로 인한 제주 목사 곽흘과 이형상의 훼불 사건, 그리고 제주 4·3 사건 등에 기인한 것이다.
[고려 시대 불교 문화 유적]
현재 문헌 기록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제주 사찰들은 고려 시대에 창건된 것들이다. 그중 대표 사찰로는 존자암, 법화사, 수정사, 원당사, 묘련사 등이 있다. 이외에도 문헌 기록상 고려 시대 것으로 확인된 사찰들도 많다.
특히 만수사와 해륜사는 문헌 기록과 함께 복신미륵상이 현존하고 있어 문화 유적지로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곳에는 제주 시내를 중심으로 동서 방향에 고려 시대의 미륵불로 추정되는 복신 미륵이 자리하고 있다. 그중 동쪽 건입동에 있는 것을 동자복, 서쪽 용담동에 있는 것을 서자복이라 칭한다.
본래 동자복 미륵은 만수사 경내에, 서자복 미륵은 해륜사 경내에 있었으나, 만수사와 해륜사가 1702년 이형상에 의해 헐림에 따라 현재 미륵불만 남게 되었다.
이외에도 고려 시대 사찰로는, 고려 충렬왕 시대인 1275년에서 1308년 사이에 활동한 시승(詩僧) 혜일의 시에 묘사된 서천암·보문사와, 유물이 발굴되고 있는 강림사지·곽지사지·고내리 사지·금덕리 사지·일과리 사지·해륜사지·서천암지·오조리 사지·광령리 사지·성불암지·상귀리 사지·보문사지·관음사지·해안동 사지 등이 있다.
이들 폐사지에서는 고려 시대 도기 편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산방굴사를 비롯한 20여 개소의 사찰에서 고려 시대의 기록, 또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현재 확인된 폐사지는 74곳에 이르며, 그 밖에 30여 곳의 사찰터가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과 같이 고려 시대 제주 불교는 존자암, 법화사, 수정사 등이 비보사찰로 지정되었을 만큼 국가적 지원 아래 종교 문화의 꽃을 피웠고, 제주도 전역에 걸쳐 골고루 퍼져 민간의 생활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묘련사에서 행해진 불경 판각은 고려 시대 제주 문화의 수준 높은 면모를 확인시켜 주는 사례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주 불교에 대한 전문적인 발굴 조사와 연구 성과는 거의 전무한 실태이다. 불교 유적이 종교사적이라는 인식을 벗어버리고 접근한다면 제주의 고려 시대 사회·문화를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시대의 불교 문화 유적의 훼손]
제주의 불교는 1565년 곽흘 제주 목사 때부터 불상과 사찰이 훼철되기 시작한 이후 1702년 이형상 제주 목사에 이르러 맥이 끊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이형상이 『탐라순력도』(1702) 서문에서 “온 고을의 음사(淫祠)와 불상을 모두 불태웠으니, 이제 무격(巫覡) 두 글자가 없어진 셈이다”라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제주 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석전제(釋奠祭)를 행하던 3읍의 성묘(聖廟)를 수리하고 덕망 높은 선비를 뽑아 교학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고·양·부의 삼성사(三姓祠)를 건립하여 유교를 장려하였다.
이형상은 제주 목사로 부임하기 직전 경주부윤을 역임하면서 관청 내에 있던 신당 2개소와 각 촌락의 총사(叢祀) 36개소를 모두 불살라버렸다. 또한 그 터를 몰수하여 학궁(學宮)에 강제로 편입시켰던 전력이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이형상은 유교 이외의 종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 탄압을 실천에 옮긴 유학자임을 알 수 있다. 제주도에서 그의 행적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1704년에 쓴 『남환박물』에서 “온 섬 5백 리에 지금은 사찰이나 불상이나 승려도 없고 염불자도 없으니 불도의 액이라 말할 수 있다”고 표현하였다. 여기서 그는 제주도에서 무속과 불교를 없애려고 한 노력이 효과가 있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상황은 그의 작품인 『탐라순력도』의 ‘건포배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작품은 1702년 12월 20일 이형상 제주 목사의 선정에 대해 도민들이 감사의 표시로 임금께 절을 올리는 모습과 신당이 불타는 모습을 그려놓은 것이다.
1733년 그의 행장(行狀)에는 “도민 700여 명이 건포에 모였는데 어찌 감히 공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냐면서 신당과 두 곳의 사찰을 불사르고 불상을 바다에 던졌다. 제주 목사로 부임하여 불과 6개월여 만에 제주도의 신당 129개소를 불태우고, 해륜사와 만수사를 헐어 관가의 건물을 짓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부기’에는 사찰 다섯 곳을 파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대 불교 문화 유적의 훼손]
근대에 이르러 한라산 관음사 창건을 시작으로 중흥기에 들어선 제주 불교는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막대한 물적, 인적 피해를 보게 된다. 현재까지 밝혀진 4·3 사건 당시 피해 사찰 수는 제주시 지역 26개소, 서귀포시 지역 9개소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피해 사항은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모두 소실되었고, 당시의 상황을 증언할 만한 인적 재산도 모두 제주 4·3 사건 당시 희생되었기 때문에 일부에 불과에 불과할 것으로 보인다.
[발굴 조사 과정]
제주도의 불교 문화 유적은 1975년 제주 대학교의 발굴 조사에 의해 수정사지의 존재가 밝혀졌고, 이후 법화사지·원당사지 등에 대한 조사가 이어졌다. 그 후 2004년에 제주도와 제주 문화 예술 재단 문화재 연구소에서 『제주 불교 유적 조사 보고서-제주의 폐사지-』를 발간하여 현재까지 조사된 내용을 정리해 놓았다.
그러나 이는 주로 근대 이전의 사찰에 대한 조사에만 국한되어 있어, 제주 4·3 사건과 한국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전혀 보고되지 않았다. 이후 2004년에 『한국 전쟁과 불교 문화재』Ⅱ-제주도편-이 발간되면서 제주 4·3 사건 당시 모두 불타버렸거나 파옥, 철거된 불교 유적지에 대한 내용이 보고되었으나 여전히 미확인된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불교 문화 유적의 분포]
1. 근대 이전의 제주도 불교 유적지로 총 85개소가 현재 확인되었다. 그중 제주시 지역은 약 50여 곳이다.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표〉근대 이전 불교 유적지
2. 제주 4·3 사건 당시 전소, 파옥, 철거된 불교 유적지는 총 35개소가 확인되었다. 그중 제주시 지역은 총 26개소이다.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표〉제주 4·3 때 훼손된 불교 유적지
[현황]
제주 불교 유적에 대한 조사는 일부 분야에서 진척을 보이고 있으나 여전히 많은 숙제를 안고 있다. 발굴 조사 과정에서 귀중한 고려 시대 문화유산으로 확인이 되었음에도 도시 개발의 와중에 완전히 사라지고만 수정사가 좋은 예이다.
또한 제주 4·3 사건 당시 사라진 불교 유적들에 대한 조사도 일부 관심 있는 이들에 의해 어렵게 진행되고 있다. 제주 불교 유적은 종교를 떠나 제주의 역사와 문화의 정체성을 확립시켜 줄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좀더 적극적인 발굴 조사와 연구 작업이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