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376 |
---|---|
한자 | 金錫翼 |
영어음역 | Kim Seokik |
이칭/별칭 | 김석조(金錫祚),윤경(胤卿),윤경(允敬),홍점(鴻漸),심재(心齋),일소도인(一笑道人),해상실사(海上佚史)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동전 |
성격 | 한학자|서예가 |
---|---|
출신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 |
성별 | 남 |
생년 | 1885년(고종 32) |
몰년 | 1956년 |
본관 | 광산 |
[정의]
일제강점기 때 제주 출신의 한학자이자 향토사학자.
[개설]
본관은 광산. 자는 윤경(胤卿)·윤경(允敬)·홍점(鴻漸), 호는 심재(心齋)·일소도인(一笑道人)·해상실사(海上佚史). 초명은 김석조(金錫祚)이다. 아버지는 김창규(金昌圭)이며, 조선 말기에 의병운동을 벌였던 김석윤(金錫允)[1877~1949]의 동생이다.
[활동사항]
여덟 살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의 기초를 배웠으며, 열세 살 때 할아버지가 사망하고 열 살 때 어머니마저 여의였다. 16세 때인 1920년에 아석(我石) 이용호(李容鎬)에게 한문을 배웠다. 이용호는 충청북도 보은군 사람으로 교리(校理)를 지냈으나 1896년(고종 33)에 유배 7년형으로 제주도에 귀양을 왔고 1901년(고종 38) 6월에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신지도로 이배되었던 한학자이다.
이후 김석익은 광주광역시 동구 서석동에 살았던 안병택(安秉宅)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안병택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출생으로, 아버지 안달삼(安達三)을 따라 일찍이 광주로 옮겨 살았다. 이 무렵 의병장이었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1846~1916]이 거주하던 한천정사로 찾아가 문하생이 되었으며,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이미 기울어지자 기우만의 구국 격문을 몰래 가지고 귀향하였다.
이때부터 민족혼을 진작할 계책을 찾아 먼저 『탐라기년(耽羅紀年)』저술에 몰두하여 1915년에 완성하였고, 1916년 가을에 『탐라관풍안(耽羅觀風案)』의 오류와 빠진 부분을 수정하고 보완할 무렵 주변에서 한문서당 개설을 권장하자 이를 실행하였다.
이 무렵 강창보(姜昌輔)[1902~1945], 한상호, 김택수(金澤銖), 김정순, 김정로, 고경흠(高景欽)[1910~?] 등이 김석익의 문하에 출입하며 한문을 익혀 그 영향을 입어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광복 후 초대 도지사를 역임하였던 박경훈, 의학박사 홍순억 등의 명사들도 김석익의 문하생이었다.
한편 광복 직후 미군정 하의 공간도 한반도의 분단으로 혼란은 지속되었다. 1948년 초 민주독립당은 제주도 지구당을 창당하기 위해 제주북국민학교에서 결성대회를 개최하였고 이때 김석익이 내빈 자격으로 참석하였으며, 만장일치로 도당(道黨) 위원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김석익은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거나 의병활동에 나서거나 또는 독립단체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글로써 민족혼과 후진을 일깨워 애국정신을 고취시켰다.
[저술 및 작품]
저술에 『탐라기년』, 『탐라기년속편』이 있다. 『탐라기년』은 938년(태조 21)부터 1906년(고종 43)까지의 탐라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것이다.
『탐라기년속편』은 1906년(광무 10)부터 1955년까지의 제주의 현대사를 재정리한 것이다. 또한 『탐라인물고(耽羅人物考)』, 『파한록(破閑錄)』, 『유리만필(儒理漫筆)』 등을 썼을 뿐만 아니라 일본 오사카를 비롯해 한양, 청진, 정읍 등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식견을 넓혀 『북행록(北行錄)』, 『근역시화(槿域詩話)』, 『천주교란기』, 『양경천전(梁擎天傳)』 등을 비롯해 많은 글을 썼다.
서예도 당대 최고봉으로 알려졌는데, 특히 해서(楷書)로 쓴 「황고부근행장(皇考府君行狀)」과 행서로 쓴 「퇴계선생 복축사(退溪先生卜築詞)」는 매우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