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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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年培 |
영어음역 | Kim Nyeonbae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381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창후 |
성격 | 항일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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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381 |
성별 | 남 |
생년 | 1896년(고종 33) |
몰년 | 1923년 |
본관 | 김해 |
[정의]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활동사항]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제주에도 그 영향이 미쳤다. 김장환(金章煥)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제주에 도착하여 김시범(金時範)과 협의하여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3월 17일부터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때 동지로 참여한 사람은 김년배를 비롯하여 김시은(金時殷)·고재륜(高載崙)·김형배(金瀅培)·황진식(黃鎭式)·김용찬(金容燦)·백응선(白膺善)·김장환·박두규(朴斗圭)·이문천(李文千)·김희수(金熙洙)·김경희(金慶熙)·김필원(金弼遠) 등이었다.
거사 날짜를 3월 21일로 정하였는데, 이 날이 제주 유림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김시우(金時宇)의 제삿날이므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3월 21일 1차 시위에서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시위는 3월 24일까지 연 4일 동안 벌어졌다.
김년배는 3월 23일 제3차 시위에서 백응선·이문천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고, 조천리에서 1백여 명이던 시위대가 함덕리에 이르렀을 때에는 8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3월 24일 4차 시위 때도 김년배가 시위를 주도하였다. 장터에 모인 1,500여 명의 군중이 검거자 석방을 요구하였으며 오일장을 보러 왔던 부녀자들 상당수도 시위에 합세하였다.
4차 시위 때 김년배 등 4명이 체포됨으로써 만세 운동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김년배는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항소하였고,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이 확정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9년 12월 12일 가출옥되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23년 11월 26일 28세로 요절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